- 아들 허 회장도 선대 유지 이어
- 100억 투입해 교정 신축 등 지원
- 별세 후 재단설립 장학금 지급도

경남 진주여자고등학교에서 승산 허완구 회장을 기리는 기념비가 12일 제막됐다. 이번 제막식을 계기로 진주여고의 탄생과 성장 과정의 중심에 있는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 허 씨 가문의 3대를 이은 진주 사랑이 지역민 사이에서 회자된다.

진주여고 동창회가 12일 교정에서 학교 발전에 기여한 고(故) 승산 허완구 회장의 기념비 제막식을 열고 있다. 김인수 기자

진주여고 동창회(회장 안옥련)는 이날 동창회 체육대회가 열린 교정에서 2017년 2월 타계한 승산 허완구 회장 기념비 제막식을 열었다. 제막식에는 허완구 회장의 부인인 승산나눔재단 김영자 이사장, 아들 허용수 GS에너지 대표이사, 딸 허인영 ㈜ 승산 대표이사 등 일가 친·인척과 이 학교 동문들이 참석했다.

교내 효주 기념관 왼쪽에 설치된 기념비에는 허완구 회장이 부친인 고 효주 허만정 LG그룹 공동창업주가 주도해 세운 진주여고에 각별한 애정을 쏟아 학교의 전 교정을 새롭게 설계, 건축했다는 내용과 재학생과 졸업생을 위한 장학사업을 지속했다는 내용 등이 기록돼 있다. 이날도 허씨 일가는 학생 30명에게 장학금 총 4300여만 원을 전달했다. 허씨 일가는 이 학교 학생에게 1986년부터 장학금을 계속 지급하고 있다. 이어 허완구 회장의 사위인 피아니스트 조재혁 씨의 콘서트가 열려 여고 동창생들에게 색다른 문화적 이벤트를 선사하기도 했다

■진주여고와 허씨가의 인연

진주여고와 허씨가의 인연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주에서 이름난 거부의 아들인 허만정 선생은 1919년 3월 1일 일어난 만세운동에서 동포들이 일제의 총칼 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 우리 민족이 다시 일어서려면 교육으로 힘을 기르는 게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향에 제대로 된 학교를 세우려고 경남에 사는 여러 유지와 뜻을 같이하고 자본을 모으기 시작했다. 상황이 녹록지 않자 허만정 선생은 아버지인 지신정 허준 옹을 설득해 함안에 있는 토지를 처분한 10만 원을 학교 설립자금으로 출연했다. 그렇게 허만정 선생이 주도하고 지역민이 힘을 보태 1925년 진주여고의 전신인 일신여고가 탄생했다.

당시 독립운동이 다시 일어날까봐 우려한 일제 때문에 여고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일신여고는 공립화되면서 진주여고로 교명이 변경됐다. 진주여고 체육관 앞에는 허만정 선생의 뜻을 기리는 얼굴 동상이 세워져 있다.

■대를 이은 진주여고 사랑

허만정 선생의 다섯째 아들인 허완구 회장은 선대의 유지를 이어 진주여고를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허완구 회장은 1986년부터 매년 장학생을 선발해 33년 동안 학생 1000여 명에게 장학금 10억7000만 원을 전했다. 또 아버지 호를 딴 효주 기념관을 건립해 학교생활관교육과 음악교육 등 다양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1991년에는 사비 100억 원을 들여 지금의 진주여고 교사를 신축했다. 본관 현관은 일신여고 현관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고, 그 외는 서양 명문학교를 본떠 건축했다. 애정을 쏟아 가꿨던 좋은 나무도 학교에 옮겨 심는 등 정성을 다했다. 1995년에는 체육관인 일신관을 짓고 기증해 진주여고가 명문으로 거듭나는데 기여했다. 허완구 회장이 타계했을 때 운구행렬이 지수면 선영으로 가기 전 진주여고를 들렀을 정도로 진주여고는 허완구 회장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부자의 뜻은 이제 허완구 회장의 부인인 김 이사장이 잇는다.

김 이사장은 허완구 회장이 별세하자 석 달후에 승산나눔재단을 설립해 첫 사업으로 진주여고 재학생 30여 명에게 4200여만 원의 장학금을 전했다. 김 이사장은 “남편은 생전에 ‘승산나눔재단’이라는 이름까지 직접 정하고 진주여고 장학사업을 계속하길 원했다. 학교를 설립한 선대의 뜻과 남편의 유지를 이어 장학사업을 오래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진주여고 동창회는 이런 허씨 일가의 사랑에 화답해 허완구 회장과 김 이사장을 명예 졸업생으로 추대했다.

■허씨가의 지역사랑

허 씨 가문의 진주 사랑은 진주여고에만 머물지 않았다.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산리의 만석꾼인 허씨 집안은 구한말부터 ‘의장답’을 운영했다. 흉년이 들면 구휼하고, 공공사업에 쓰려고 허 씨들이 따로 출연해 놓은 땅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고 백정들이 신분 해방을 위해 ‘형평사 운동’을 벌일 때도 자금을 지원했다.

한국전쟁으로 인민군과 국군이 차례로 마을을 점령했을 때도 허씨 집안이 마을 주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앞장선 일화도 유명하다. 수많은 우익과 좌익의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군인에게 짓밟힐 위기였지만, 허만정 선생이 앞장서 만류하자 인민군이든 국군이든 그 말을 못 들은 체 하지 못했다. 허씨 집안을 칭송하는 비석이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을 정도로 마을 사람들 인심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 허완구 회장은 생전에 부인과 수시로 고향에 내려와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한 달에 한두 번 진주 중앙시장에서 장을 봐 상인들이 모두 알아볼 정도였다. 허완구 회장 장례 때 조문하려는 시장 상인과 식당 주인들이 줄을 잇기도 해 허완구 회장의 소탈함을 되돌아보게 했다.

김인수 기자 iski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