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부터 정들었던 국사암 마을
- 2년 전 터 잡고 본격적으로 녹차 재배

- 예초기·채엽기계 모두 마다하고
- 무식하게 낫만 들고 오르락내리락
- 고사리 뽑고 찻잎 주변 정리하느라
- 손가락 마디마디 아리고 아프지만
- 생애 최고 차 재배한단 자부심 뿌듯

- 나만의 방식으로 ‘청정 녹차’ 키우며
- 산자락에 스며든 모습 “원주민일세”

오른쪽 손목이 너무 욱신거려 힘을 줄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오른손으로 넝쿨에 낫을 대고 왼손으로 잡아당긴다. 왼쪽 손가락도 만만찮게 아리다. 양쪽 손가락 역시 관절염이 생겼다. 마을 어르신들이 말씀하신다. “낫 한 자루 갖고 그렇게 녹차농사를 지으면 손목이며 손가락 다 골병들어. 예초기나 기계로 해야지.”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골 계곡에서 바라본 필자가 살고 있는 목압마을 풍경. 마을 뒤 사진 오른쪽 산 가장 높은 곳에 필자의 차밭이 있다.

필자는 지난해 봄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윗마을인 목압마을로 들어와 녹차농사를 짓고 있다. 첫해인 지난해는 녹차를 많이 만들지 못했다. 올해도 우전을 딸 시기에 다른 일이 생겨 원하는 만큼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지인들과 조금씩 나눠먹고 있다.

지난해는 기존 녹차나무에서 잎만 채취했지만 올봄에는 지난 1년간 직접 차밭을 가꿔 찻잎을 따 녹차를 만들었다. 그런데 차밭을 가꾸는 데 필자의 고집 아닌 고집이 가미됐다. 첫째는 제다를 하게 되면 필자도 마실 것이고, 지인들 그리고 누가 마시든 사람의 입에 들어갈 것이어서 내 손으로 직접 차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어루만지며 자식 키우듯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둘째는 예초기나 채엽기계 등을 사용하지 않고 손과 낫만으로 차나무를 관리하게 되면 모양은 예쁘지 않지만 가시나무나 칡뿌리 등을 다 뽑고 캐낼 수 있어 차나무에 아주 이롭다는 것이다.

	부산의 친구가 놀러와 “주민보다 더 원주민 같다”며 놀려댄 필자의 모습.

실제 지난해 찻잎을 수확한 후 올봄 우전을 딸 때까지 1년간 낫 한 자루를 갖고 거의 차산에서 살았다. 필자보다 키가 큰 차나무의 높이를 좀 낮춰주고, 수년간 묵어 거의 나무화돼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수백 그루의 가시나무를 뽑아내고 벼랑으로 옮기느라 온몸과 얼굴에 상처가 났다. 적어도 지난 10여 년간 한 번도 관리가 되지 않은 채 차밭이 묵어있었던 것이다.

차밭에 자생하는 고사리가 왜 그리 키가 크고 많은지 그걸 낫으로 잘라냈다. 연세가 많은 화개골 농부에게 녹차농사는 짓는 게 힘들고 소위 돈이 되지 않다보니 상대적으로 수입이 많은 고사리 농사를 짓는 경우가 더러 있다. 고사리는 별도로 심지 않아도 산의 차나무를 베어내면 고사리 포자가 날아오는지 금방 고사리밭으로 변한다. 필자는 고사리는 베어내더라도 차나무는 살려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베어진 차나무 뿌리부분에서 찻잎이 하나라도 올라오면 주변 정리를 하여 잘 자라도록 손으로 고사리 뿌리를 뽑아낸다. 그러다 보니 지난해 고사리를 자르고 뽑아내는 게 가장 힘들었다.

그렇게 꼬박 1년간 차산에서 일을 하여 손목과 손가락에 문제가 생긴 탓에 올봄에 녹차를 덖고 비빌 때 손목과 손가락이 아파 고생을 많이 했다. ‘올해는 예초기를 사용해볼까’라고 생각을 잠시 했다가 ‘아니다. 내 손으로 직접 가꿔야지’라는 생각에 다시 손목과 손가락에 파스를 붙여가며 무식하게(?) 일을 한다.

필자가 사는 마을은 쌍계사 바로 위쪽에 있는 국사암 동네이다. 불일폭포로 가는 등산객들은 쌍계사에서 올라가기도 하지만 이 마을을 거쳐 국사암으로 올라간다. 필자가 이 마을에 처음 왔던 게 고등학교 졸업 무렵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에 다녔던 필자는 산을 좋아했다. 그 후로 대학 다닐 때도 일 년에 몇 차례씩 지리산을 등반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는 지리산 중에서 지금 필자가 살고 있는 목압마을에서 불일폭포로 이어지는 코스를 가장 좋아했다. 불일폭포 코스를 선호한 건 등산길 그 자체도 아름다운데다 고운 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설화나 전설도 많고, 아버지로부터 이 인근이 신선이 사는 ‘청학동’으로 인식돼 옛 선비들이 많이 찾던 공간이라고 수차례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여기서 지리산 쪽으로 더 가면 만나는 의신마을을 지나 좌회전해 만나는 칠불사는 김수로왕과 그의 일곱 아들이 성불했다는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은 초의선사가 ‘다신전(茶神傳)’을 등초하고, ‘동다송’을 기초한 곳인 데다, 선종의 다선(茶禪) 사상, 즉 당나라 조주선사의 ‘끽다거’ 수행법의 맥을 오랫동안 이어오는 수행처이다. 이 골짜기에서 출가를 한 서산 대사가 20년 가까이 화개골에서 수행을 하면서 자신도 선다수행법의 맥을 잇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화개골은 어디나 녹차와 관련된 특별한 장소인 셈이다.

목압마을은 아버지와 내가 좋아하고 늘 마시던 녹차를 농사 짓는 곳이다. 그러니까 20대 때부터 나이 들어 이곳으로 들어와 지리산 산행도 하고, 인근의 여러 역사와 전설 등을 채집하고, 내가 마실 녹차농사를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다 이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그런 마음이 모인 때문일까. 지리산 화개골 중에서 이 마을에 인연이 되어 지금 녹차농사를 짓는 다부(茶夫)로 살고 있다.

이 마을엔 팔려고 내놓는 집이 없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마을은 인연이 있는 사람만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신다. 마을은 산간지역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내 집은 마을의 한복판에 있다. 새로 지은 집은 아니고 기존의 농가가 인연이 돼 살고 있다. 필자의 집은 쌍계사의 전신인 목압사가 있었던 절터이다. 집 담장 너머에는 지금도 목압사의 주춧돌이 뒹굴고 있다. 대문은 있지만 한 번도 닫은 적이 없다. 늘 활짝 열어놓고 있다. 대문을 열어놓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마을 사람들과 소통을 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이다. 마을 사람들과 한 가족으로 지내겠다는 말 없는 표상인 것이다. 여하튼 그 덕에 사시사철 어르신들이 상추 표고버섯 감자 고구마 감 등 수확한 농산물과 김치 등을 수시로 “맛이나 보라”며 가져다주신다.

화개장터가 있는 화개면 소재지에서 의신마을까지의 골짜기 가운데 화개동천을 끼고 펼쳐져 있는 화개골은 기록상으로 신라 시대부터 녹차를 생산했다. ‘삼국사기’에 ‘신라의 대렴공이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오자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리산 중에서 화개골이 녹차 생산지로 가장 적합한 지역이므로, 이 골짜기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리산이라는 공간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이곳 녹차가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됐다. 차 관련 기록에서 화개골이라는 지명이 적시된 때는 고려 시대이다. 이규보(1168~1241)는 ‘손한장이 다시 화답하기에 차운하여 부치다(孫翰長復和次韻奇之-동국이상국집 권13)’라는 시에서 화개 농민들이 차농사를 지어 당시의 서울까지 등짐을 져 나르느라 고생하는 모습을 읊고 있다.

필자의 차밭은 마을 뒤의 차산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대학 때부터 옥상 화분에 차씨를 심어 녹차를 키우던 필자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기장 일원에 차나무를 재배해 제다를 하였다. 차와 관련한 자료도 많이 읽다 보니 녹차와 재배지에 대한 상식이 나름대로 체계화돼 있다.

차에 대해 모르는 분들은 “녹차밭이 평지에도 있던데, 높은 산에 있으면 농사짓기 힘들 텐데”라고 걱정을 해주신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녹차 재배지를 하필이면 임도도 없이 겨우 사람 한 명 다닐 정도의 나무꾼 길로 이어진 그 높은 곳에 정해 오르내리며 차농사 짓는 데는 이유가 있다. 평지 차밭보다 운무가 자주 생기고 이슬을 많이 받아 녹차의 성분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대개 녹차 재배지의 자연적인 조건으로는 ▷계곡을 끼고 있을 것 ▷산록에 위치해 물 빠짐이 좋고 햇살을 고루 받을 것 ▷일교차가 클 것 등이 있다. 이곳은 이러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난겨울 한파로 화개골의 거의 모든 차밭이 냉해를 입었지만 유독 필자의 차밭만은 무사했다.

이곳 화개골은 농약 사용은 물론 가축 사육도 금지된 청정지역이다. 필자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농업인임을 증명하는 ‘농업경영체’증명서를 받았고, 농협의 조합원으로 등록돼 자타가 인정하는 농부이다.

얼마 전 부산에 있는 친구 부부가 놀러왔다 차산에서 일하다 내려오는 필자를 보곤 “야, 너는 여기 주민들보다 더 원주민 같다”고 놀려댔다. 그도 그럴 것이 낡은 작업복에 밀짚모자를 쓰고 장화를 신은 채 낫 한 자루 들고 있는 모습이었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시인·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