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이 기존 가입자의 이익을 보호하려고 신규 가입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요구하는 규정을 만들었다면, 규정은 타당성을 잃어 무효라는 판결이 나왔다.

부산고등법원 민사 6부(윤강열 부장판사)는 울산시 A 레미콘·아스콘 주식회사가 울산레미콘협동조합을 상대로 제기한 레미콘 물량 배정 자격 확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2일 밝혔다.

울산레미콘협동조합은 중소기업협동조합법에 따라 설립된 조합으로 울산과 울주군이 업무지역이다. 조합은 매년 부산 조달청과 레미콘 구매 계약을 체결한 뒤 물량을 소속 조합원인 회사에 배정하는 역할을 한다.

부산에 있는 한 레미콘공장의 레미콘 차량. 기사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 국제신문DB

A 사는 지난해 3월 21일 출자금 등 3640만 원을 내고 조합에 가입했다. 그러나 조합은 A 사에 물량을 배정하지 않았다. A 사의 본점은 울산에 있으나 레미콘 공장은 울산 북구와 맞닿은 경북 경주시에 있는데, 조합은 ‘울산시에 공장을 둔 회원사에만 물량을 배정한다’는 자체 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A 사는 이 규정이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의 목적에 반해 불공정하고, 타당성을 잃어 무효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조합 측은 운송 시간이 길어지면 콘크리트가 경화할 수 있어 품질 유지 차원에서 공장 소재지를 울산시로 제한했으며, A 사에게 조합에 가입하더라도 물량을 배정하지 못한다고 미리 알렸다고 맞섰다.

1심 재판부는 조합이 A 사에 물량을 배정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물량 배정 규정을 제정했다고 보기 어렵고, 이 규정이 중소기업협동조합법에 위반된다고 볼 수도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그러나 항소심재판부는 조합의 물량 배정 규정이 현저하게 타당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A 사의 공장에서 울산시청 등 울산 주요 지점까지 자동차로 30~40분이면 갈 수 있는데, 이는 울산시내에 있는 조합의 다른 회원사와 큰 차이가 없다. A 사에 물량을 배정한다고 해서 콘크리트 경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데도, 행정구역이라는 형식적 요소로 A 사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다.

또 조합의 물량 배정 규정이 제정된 날은 A 사가 조합 가입 신청을 이틀 전인 지난해 1월 24일인 점으로 미뤄 기존 가입자들이 기득권을 지키려고 신규 가입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내건 것으로 봤다. 재판부는 “물량 배정 규정은 무효이고, A 사는 조합원이므로 부산조달청과 계약에 따라 납품하는 레미콘 물량을 배정받을 권리가 있다”고 판시했다. 정철욱 기자 jcu@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