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 창고지구를 거닐다 발길이 멈춘 곳은
- 홀로코스트 박물관, 이곳에서 확신했다
- 도시재생은 과거의 박제화가 아니라
- 현대를 통해서 미래로 나아가
- 과거를 복원하는 것임을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라트비아(Latvia)의 수도 리가 역사지구(Historic Centre of Riga)를 둘러보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을 때, 정원에 둘러앉아서 배낭여행자들과 환담하고 있던 주인이 ‘한국 당근’을 아느냐고 묻는다.

	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있는 ‘모스크바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앙시장 모습.

당근을 가장 즐겨 먹는 동물이 말인데 내가 말상처럼 보이는지, 말처럼 쉬지 않고 돌아다녀서 그런지 되물었다. 주인은, 우리 무생채 절임 같은 당근 생채 절임을 ‘코레예슈 부르칸스(Korejiesu burkans, 한국 당근)’라고 하면서 보여준다. 아마 소비에트 시절 고려인으로부터 내려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을 잇는다.

슬슬 장난기도 발동하고 분위기를 맞추려고 모바일에서 검색하여 심수봉의 노래 ‘백만 송이 장미’(1997년)를 틀어주니, 주인은 그 리듬이 라트비아의 ‘마리가 딸에게 준 삶’(1981년)과 비슷하다고 한다. 다시 검색하여 라트비아 노래가 원곡이며, 그다음 해 1982년 러시아 가수가 사랑의 노래로 바꾸어 널리 알려진 것이라고 답하자 주인은 ‘엄지 척’을 하듯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러시아’라는 말에 입을 닫는다. 옛 소련과 라트비아의 역사적 악연 탓인 듯했다. 환담이 끝나자 주인의 권유로 식사하러 중앙시장으로 가는 발걸음들이 가볍게 옮겨진다. 리가 버스터미널 뒤편에 있는 중앙시장은 체펠린 비행선(Zeppelin Airship)의 격납고 5개를 특정 상품을 판매하는 부스로 하여 1930년에 개장된다.

■창고 지구 재건축 프로젝트

	리가 게토 및 라트비안 홀로코스트 박물관 내부. 독일군의 만행에 희생된 집시를 기리는 전시물이다.

카트페유 판쿠커스(감자 팬케이크)에 코레예슈 부르칸스를 곁들여서 요기를 하자, 습관적으로 눈길을 두리번거리면서 근처에 커피숍이 있는지 찾다가 발걸음은 전찻길 건너 다우가바 강(Daugava River)으로 옮겨간다. 창고 같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입구의 커피숍으로 들어가려다 우연히 눈에 마주친 간판의 문구를 모바일 번역 앱에 입력하자 ‘창고 지구 재건축(Spikeri Quarter Reconstruction)’으로 나타난다. 재건축이라는 이름 그대로 창고 지구는 1348년부터 라스타지야(Lastadija)라는 무역항으로 쓰이다가 그 기능을 잃자 1924년에서 1930년 사이에 재건축되어 중앙시장의 일부로 사용된다.

이후 독일군의 강제 점령과 소련의 위성국 시기를 지나서 1991년 독립에 이르기까지 창고 지구를 포함하고 있는 ‘모스크바 지역’(Maskavas Forstate 또는 Moscow District라고 표기)은 일반 시민들이 거의 근접하지 못하는 우범 지역으로 남는다. 독립 이후, 모스크바 지역을 시민과 관광객의 접근이 가능한 문화와 교육 지대로 재생하기 위하여 ‘모스크바 지역과 투르게네프 거리의 개발과 재건’ 프로젝트가 시행된다.

■이토록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리가 게토 박물관 추모 조형물. 바닥의 묘비에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이름 등을 새겼다.

그 프로젝트로 창고 지구는 단순히 시장의 상품 판매 공간이 아니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창고 지구는 시장의 일부로서 때로는 벼룩시장과 공예품 시장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박물관과 전시관 그리고 예술창작공간도 들어선다.

그 공간들에서 가까운 곳에 창고 콘서트홀(Spikeri Concert Hall)과 더티 딜 독립극장(Dirty Deal Independent Theater)이 있고,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리가 콘서트홀과 함께 시민과 관광객을 위한 예술 감상의 공간이 된다.

커피숍을 나와 창고 사이로 걸어가자 여러 가지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종교- 성 조지(성 게오르기우스·Saint George) 정신의 발견, 시민 건강과 음식- 야외 요가로의 초대와 토요 레스토랑 축제, 문화와 예술- 백야 현대문화 포럼, 미래 단편 영화제 여름 축제, 예술과 소통 축제, 이브닝 야외극장, 전시- 나의 모스크바 지역 사진 전시회, 리가 게토 박물관의 희망의 나무 등등.

■도시재생, 미래로 나아가는 길

창고 건물 벽면에 붙어서 손짓하는 그 많은 포스터들 사이를 지나다가 마지막으로 발걸음이 멈추어진 곳은 ‘리가 게토 박물관의 희망의 나무’ 전시회이다.

리가 게토 박물관은 리가 게토 및 라트비안 홀로코스트 박물관(Riga Ghetto and Latvian Holocaust Museum)의 약칭이며, ‘희망의 나무’는 그 박물관의 전시이다. 그 전시를 보고자 한 것은 박물관이 창고 지구의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시 기획자는 집시족 핀란드인 베이요 발차르(Veijo Baltzar·75)이며, 주제는 ‘미란다 - 집시 여인의 홀로코스트(Miranda-The Roma Holocaust)’이다. 그 전시는 주로 유대인과 관련된 유리 상자나 벽면에 언제나 고정되어 있는 사진이나 서류 같은 문서, 증언집이나 관련 보고서와 연구서가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 영상 등을 통하여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집시 학살에 관하여 격분을 불러일으키고 현재 인류를 되돌아보게 하는 역동적인 전시이다.

그 전시에서 받은 감동을 가슴에 간직하고 바라본 새벽 먼동과 같은 백야의 하늘은 도시재생은 과거의 복원으로 박제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통하여 미래로 나아가서 과거를 부활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모바일의 메모장에 적어놓고는 스스로 웃음 짓는다. 하나 건졌구나!

민병욱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 bmw@pusa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