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궁터가 있는 구시가를 지나
- 중심도로로 들어서면
- 공산 독재에 항거해 일어난
- 시민들의 함성이 느껴진다

- 민주화를 위한 혁명이 싹틀 때
- 어떤 이들은 그라피티를 그려
- 세속화된 권력에 맞섰다
- 예술은 구시가로 이어져
- 유명한 '걷기투어'를 만들었다

- 부산에도 그런 역사와
- 그런 골목, 광장이 있는데
- 속절없이 잊어가고 있다

1926년 가수 윤심덕은 '사의 찬미'에서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라고 노래한다. 루마니아 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을 번안하여 덧붙인 노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덧없음을 통곡한다.

예술가 집단 오픈 아트가 그린 부쿠레슈티 구시가지에 그린 벽화.

80여 년 세월이 흐르고, 루마니아에 다다르니 사랑은 덧없음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기다리고 있다. '루마니아의 연인'은 북한 남편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리움으로 노래한다. "여기 두 사람의 헤어지면서 남겨 둔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은 빛처럼 지구를 돈다. 전파처럼 휘돌면서 두 사람을 이어준다. 당신과, 나 만나지 못하는 두 마음이 꿈으로 이어졌다. 빛의 길, 꿈의 길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 신비로운 길 위에서 당신의 안부를 전해 들었다. 우리에게 꿈길밖에 길이 없으니…"(권현숙의 소설 '루마니아의 연인'에서)

■걷기 투어가 넘쳐나는 도시

독재 권력에 빌붙어 민중을 억압한 자들을 조롱하고 풍자한 그림.

길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내력을 묻어 두고 끝없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그 이야기들에 따라 공주, 무법자, 사냥꾼, 양치기, 어부, 환락 등의 도시라고 불리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길은 연인의 사랑을 넘어 문화로 거듭난다.

부쿠레슈티는 '자유걷기 통합유럽'이라는 순수 민간단체에 소속된 다른 회원 도시들, 베를린, 소피아,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런던, 키예프, 프라하, 체스키 크롬노프, 리스본, 부다페스트보다도 걷기로 거듭나는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다. 회원 도시들은 '지역적 관점'에서 속임수로부터의 자유, 압박에서의 자유를 내세우고 자유걷기 투어를 행한다. 그 투어는 자원봉사자를 안내자로 하여 지역마다 날마다 똑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무료 걷기를 한다는 것밖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다.

부쿠레슈티에는 물론 자유걷기 투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민간단체 영역에서는 너무나 착한 가격으로 하는 대안문화와 공산당을 주제로 한 걷기가 있다. 여행사에서 하는 것으로는 구시가지, 길거리 음식, 미술관과 박물관(약 40개), 공공도서관(약 700개), 대학(14개), 교외 민속촌 등을 주제로 한 유료 걷기 투어가 있다.

■문화유산과 민주화 운동의 숨결

민간단체의 자유 걷기는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자유 투어는 시계탑과 분수대가 있는 우니리(통일) 광장에서 시작하여 구시가지로 들어간다. 구시가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마누크 여관이다. 그 여관은 아르메니아 상인 엠마누엘 메르자얀(1769~1817년)이 1808년 건립하여 여전히 호텔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이어서 발길은 별칭인 드라큘라로 널리 알려진 공작 블라드 체페슈(1431~1476년)의 흉상과 그라피티들이 어울리지 않게 공존하는 골목길을 지나, 폐허가 된 구왕궁 터를 지나서, 대주교 교회를 거쳐,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루마니아 정교회 소속 크레추레스쿠 교회(1720~1722년), 스타브로폴레오스 교회(1724년), 스피리돈 교회(1747년) 등을 만난다.

민주화 혁명 때 앞장서서 노래한 루마니아 민중 가수 크리스찬 파트르샤(1964~2011)의 기념비.

구시가지의 18세기 유적은 구도심의 경우 과거로 되돌아가는 곳이지만, 중심대로는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곳이다. 1989년 12월 공산 독재를 옹호하는 관제 시위가 일어나자 부근 골목길과 대학광장에서 뛰쳐나온 시민과 학생들은 독재의 종말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다. 중심 도로는 격렬한 싸움으로 불붙는다. 그 싸움은 공산당 보안군과 시민혁명군 간의 시가전으로 번지지만, 일주일도 되기 전 종전되고, 민주화 혁명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중심도로는 새로운 미래를 기다리는 혁명광장이 되고 대학광장과 골목길은 미래로 가는 문화의 생산지가 된다.

■골목길을 다시 발견하자

예술가 집단 오픈 아트의 거처.

대안 (문화) 투어는 대학광장 옆 통일제국의 건국 영웅 미하이 비테즐(1558~1601)의 기마상에서 출발한다. 만삭의 몸으로 안내하는 자원봉사자 카르멘 키우라우는 "도시를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고 느끼기를 바란다"는 말로 참가자들을 맞이한다. 그녀의 첫걸음은 국립극장 앞에 세워진 민중 가수 크리스챤 파트르샤(1964~2011)의 기념비와 한 젊은이의 무덤에 머무른다.

그녀는 작은 골목과 골목길에서 광장으로 달려와 민주화의 생명을 시작한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함성 앞에서 묵념을 올리듯 나지막한 소리로 안내한다. 그녀는 민주화의 생명이 처음 잉태되었던 골목길로, 더 좁은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발걸음이 머문 곳에는 평범한 시민들의 생생한 숨결이 숨어 있다. 또한, 공산당과 이에 빌붙은 세속 권력자들과 싸웠던 사람들이 그림으로 하소연한 벽화들이 자리하고 있다.

혁명이 시작돼 민주주의가 숨을 쉴 때, 예술가집단 오픈 아트는 도시 문화를 낙서에서 그라피티로, 그라피티 축제로 재생한다. 그 재생은 구시가지까지 나아간다.

물론, 우리 부산에도 구시가지와 중심대로가 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그 역사와 문화를 아직도 뭉개고 있는데 있으면 무얼 하랴? 우리는 서면 거리와 광복동 거리에서 펼친 부마항쟁과 같은 민주화 운동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지 못하고, 그 항쟁을 일으킨 대학교는 기념관 정도의 이름으로 허울처럼 치장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서면과 광복동으로 뛰쳐나온 시민의 골목길, 진압하려고 덤벼드는 공권력을 피해 숨어 달아나다가 다시 거리로 뛰쳐나오게 한 골목길을 잊어가고 있다.

민병욱·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