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가는 여행자를 '노골적으로 엿보는' 소방관
- 나폴레옹 군대의 병사로 왔다가 지역명물 와인을 남긴 허버트 동상

- 위인의 동상이 장엄하게 버틴 한국 거리에서
-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와 온기를 만나고 싶다

'브라티슬라바가 어디인가요? 체코슬로바키아예요? 체코인가요? 슬로바키아예요?'

브라티슬라바 흘라브네 광장의 가게 지붕에 있는 동상.

여행사진을 온라인에 올려 가족에게 '안전하게 잘 여행하고 있다'는 안부를 전하자, '친구'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브라티슬라바는 채 25년도 되지 않은 신생 독립국가 슬로바키아의 수도라고 답한다. 많은 친구는 왜 그곳으로 갔는지 머리를 갸우뚱한다.

근대에는 헝가리 왕국의 수도(1526~1784)였다가, 두 차례 세계대전 기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 속한 슬로바키아 주의 주도였다가 1993년부터 슬로바키아의 수도라고 설명한다면 친구들은 뭔가는 모르지만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자, 떠나자 다뉴브의 아름다움, 작은 거인의 도시라는 별칭을 가진 브라티슬라바로.

'떠나라/낯선 곳으로/아메리카가 아니라/인도네시아가 아니라/그대 하루의 반복으로부터/단 한 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그대 떠나라.'(고은의 시 '낯선 곳' 중)

■여행객을 '엿보는' 소방관 동상

사랑의 사연을 간직한 이그나즈.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습관처럼 여행자들은 관광 명소를 둘러볼 뿐 그 도시만이 가진 독특한 체취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브라티슬라바의 독특한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구시가지 골목길을 건성건성 둘러보는 여행자들을 맞이하는 동상들이다. 그 동상들은 구시가지의 중심 흘라브네 광장부터 골목길마다 있으면서 여행자들을 엿보거나, 몰래 인사를 건네며 자유로운 몸짓으로 맞이한다.

'작업 중'이라는 팻말과 함께 맨홀에 턱을 괴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지켜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소방관'은 여행자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소방관의 이름은 '엿보는 자'이다. 그는 두 가지 소문을 달고 다닌다. 그 소문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 전형적인 공산주의 시절의 노동자였다거나 여인의 치마 속을 엿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방관 동상은 조각가 빅토르 휼이 1997년 6월 26일 세웠다.

빅토르 휼릭이 1997년 만든 '엿보는 자'.

여행자를 엿보는 사람은 또 있다. '소방관'과 함께 라드니치나 거리 구석 레스토랑 옆 숨어 있는 '파파라치' 동상이다. 불행히도 레스토랑이 폐업을 하자 주인은 그를 구시가지로부터 도나우 강 너머 에스엔페 대교의 전망대에 있는 UFO 레스토랑으로 이주시켰다.

파파라치가 보고 싶지만, 그 전망대 레스토랑에 갈 여유가 없어 실망할 때, '아름다운 나스'가 여행자들에게 미소를 보낸다. 그는 거리의 모든 동상들 가운데 희귀한 실재 인물이다. 그는 프레스부르크(브라티슬라바의 옛 지명)에 살았던 이그나즈 라마르였다. 그는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의 소문 속에 있었다. 짝사랑한 여인으로부터 결국 사랑을 되돌려 받지 못한 그는 미쳐갔고, 세드라르스카 거리를 지나가는 여인들에서 모자를 벗어들고는 꽃을 바쳤다. 그는 이제 비바람의 모진 세월을 견디는 오매불망 동상이 되어 사랑을 잃고 홀로 지나가거나 서로 부대끼며 속삭이는 연인들에게 모자를 벗고, 사랑의 꽃을 바치고는 웃고 있다. 이그나즈는 아직도 그녀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을까?

■사랑을 기다리는 허버트

파파라치 동상. 에스엔페 대교 전망대에 있다.

'우체국에 가면/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풀잎 되어 젖어 있는/비애를,/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이수익의 '우울한 샹송' 중에서)

이그나즈의 짝사랑을 되찾으려 다뉴브 강을 따라서 이어지는 산책길로 접어들면 그 입구에 우체통이 나온다. 우체통에는 사랑의 편지를 기다리는 한 여인이 걸터앉아 있고 또 한 여인은 그녀를 애처로이 바라보고 있다.

스파클링 와인을 만든 실존 인물 허버트 동상

그녀의 연인은 누구일까? 허버트일까? 허버트는 나폴레옹과 같이 이곳으로 와서(1805년) 한 여인과 사랑하면서 스파클링 와인을 제조하며 살아간다. 그녀와 '스파크'가 일어나는 사랑을 한 허버트는 죽어서 모든 슬로바키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파클링 와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제 허버트는 젊은 날의 군복을 입은 동상이 되어 벤치에서 사랑스러운 그녀를 기다린다.

골목길 구석이나 거리의 가장자리에서 소담스러운 이야기를 건네는 동상들을 지나서 흐비쯔도슬라보브 광장으로 나오면 또 동상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 광장에 서 있는 동상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 사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나 만나는 우상들이다. 그 우상의 동상은 브라티슬라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 동상, 도시상징 되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물론 부산과 한국의 도시에도 역사적 인물은 동상으로 대로변에 버티고 서 있다. 시민은 좀체 그 동상들에게 눈길을 주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다지 멀지도 않은 작은 촌락이었을 때 살았던 평범함 사람들, 역사의 격변을 겪으면서 가슴 뭉클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온기를 골목골목에 느끼고 싶다. 이념의 논리로 세운 역사적 인물의 동상을 파괴하고 부산의 거리에서 골목에서 삶의 향기가 스민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여행자들은 거리에서 책 속의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슴에 묻고 자기를 되돌아본다.

민병욱·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