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low slow, 숯-soot, 사뿐-supple, 불다-blow, 보리-barley 등 우리말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비슷한 발음의 영어 단어가 숱하게 많다. 이런 신기한 현상은 우리 생각의 관심을 태곳적으로 옮긴다. 아주 먼 옛날 어느 한 곳에서 쓰이던 낱말이 여러 갈래로 흩어지게 되어 각 지역에서 약간씩 발음이 다르게 된 건 아닐까?

배(왼쪽)와 음은 비슷해도 다른 서양 Pear.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 언어를 혼잡게 하셨음이라(창세기 11:8~9)." 성경의 바벨탑 이야기는 그러한 짐작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실마리다. 언어를 혼잡게 하셨기에 낱말들은 서로 달라졌지만, 발음이 서로 비슷하게 남은 건 아닐까? 타는 배와 보트(boat), 몸통 배와 벨리(belly)의 발음이 비슷한 것도 그런 연유가 있었을 것 같다. 먹는 배와 'pear'의 발음이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사과를 뜻하는 apple과 배를 뜻하는 pear를 합치면 'appear'다. 그렇다고 사과와 배가 탐스럽게 나타나는 모양에서 '나타나다'는 뜻의 'appear'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짐작한다면 억지다. 이는 그냥 우연인 듯하다. 하지만 배다와 bear는 인연이 있는 듯싶다. 배꽃나무가 둥그런 열매를 배니(bear) 배가 된 건 아닐까?

아름다운 배꽃(梨花)으로부터 탐스럽게 열리는 배는 서양의 pear와 발음이 비슷해도 색깔, 형태, 식감 등이 크게 다르다. 우리 배가 모두 연황색에 둥근 공처럼 생겼고 사각사각 씹힌다면 서양 배는 주로 연녹색에 조롱박처럼 생겼고 허벅허벅 씹힌다. 우리 입맛에는 우리 배가 세계 최고다. 저들 입맛에는 우리 배가 어떨까? 자기네 배 맛이 더 좋다고 하더라도 뭐라 할 수 없겠다. 동서양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처럼 입맛 역시도 다양하다는 걸 수용 인정해야 하기에.

박기철 경성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