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과 연결된 서부터미널
- 하얀 김 내뿜는 오뎅 솥 자리에
- 번듯한 편의점이 들어선 모양
- 늘어선 줄 대신하는 자동발매기
- 어쩐지 쓸쓸해진 요즘의 풍경

- 독특한 외관의 인디스테이션
- 로컬 뮤지션의 특별한 음악
- 짐가방 끌고가던 관광객부터
- 행인·이주노동자들이 멈춰선다

- 역 뒷편에 생겨난 아시아거리
- 타국에서의 삶 생경할 이들이
- 가족을 그리며 살아가는 이 곳

도시철도를 타고 사상 역에 도착하면 유난히 복잡하고 넓은 사상 지하철 역내를 매번 처음처럼 두리번거리며 헤매게 된다. 그러다 겨우 지상으로 올라오면,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낯설고 먼 곳으로 떠나 온 것만 같다.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강바람과 어디로 떠나는지 캐리어 가방을 끌거나 큰 배낭을 메고 분주히 부산서부버스터미널로 향하거나 막 빠져나오는 행인들, 알아들을 수 없는 생소한 모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다른 피부색의 이주민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높이 하늘을 가르듯 김해 방면을 향해 뻗어있는 레일 위로 오고 가는 경전철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어릴 적 공상과학영화에서 본 미래도시의 풍경이 연상된다. 컴컴한 어둠속을 달리는 지하철과 달리, 탁 트인 낙동강변과 김해공항을 지나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마치 허공 위를 달리는 듯 한 김해 경전철을 탈 때면, 오래전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 마냥 괜히 마음이 들떴다. 경전철 레일 아래 보도에선 산나물과 뻥튀기, 과자, 사탕 등등의 좌판을 펼치고 앉아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이질적인 듯 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러고 보니 사상에 올 땐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거나 멀리서 찾아오는 이를 마중 나가기 위해 부산서부버스터미널로 향하던 때가 대부분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서부터미널의 풍경도 참 많이 바뀌었다. 가뜩이나 유동인구가 많은 서부 터미널 입구엔 한창 공사 중이라 공사현장 가림막이 보도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 더욱 번잡하다.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빠르게 풍경이 변해갈지 모르겠다. 버스터미널로 들어서니 예전에 하얀 김을 뿜는 어묵 꼬치가 가득 담긴 솥과 삶은 계란, 망에 담긴 귤, 등등의 먹 거리를 팔던 작은 구멍가게 대신 크고 번듯한 편의점이 들어서 있고, 칼국수나 우동, 라면, 김밥 등을 팔던 식당 대신 온갖 다양한 메뉴들을 갖추고 있는 푸드코트와 아울렛이 연결되어 있다. 오래전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매표소 역시 한산하다. 평일이기도 하지만, 매표소 대신 그 옆에 일렬로 가지런히 서 있는 자동발매기로 빠르고 간편하게 버스표를 구매하는 손님들이 많기 때문이다. 시외버스들이 질서정연하게 드나드는 시외버스 승차장 뒤편으로 저마다 크고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며 솟아있는 호텔과 모텔 등 숙박업소들의 모습들을 보니, 어쩌면 많은 이들이 이 풍경을 부산의 첫인상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머물거나 떠나는 이들로 가득한 사상의 풍경이 어떨 땐, 다소 황량하거나 쓸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허나 길고 지루한 고속도로를 벗어나 차창 밖으로 이 풍경을 확인 할 때면 늘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들곤 했다.

부산 서부터미널 플랫폼.

근래 들어서는 시외버스나 경전철을 타야 할 때 말고도 다른 이유로 사상에 갈 때가 많다. 사상 인디스테이션 때문이다. 김해경전철 역과 도시철도 2호선 사상역 사이 광장에 27개의 컨테이너를 쌓아 올려 만든 것 같은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는 건물이다. 버스터미널, 경전철역과 함께 어느새 사상하면 먼저 떠오르는 랜드마크로 자리잡고 있다.

컨테이너를 활용한 복합문화공간이라는 뜻의 컨테이너 아트 터미널(Container Art Terminal)의 영문이니셜을 따서 캣츠(CATs)라는 별칭이 붙은 사상 인디스테이션은 소란동과 도란동 2개의 3층 건물로 나누어져 있다. 도란동은 이주민을 위한 다양한 워크숍과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다문화센터와 청년작가들의 창작활동과 생활을 위한 레지던스와 스튜디오가 있고, 소란동은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갤러리와 인디 뮤지션들을 위한 공연장이 있다. 이 곳에선 비보이댄스 공연, 힙합공연, 플리마켓, 강연회, 다문화 축제 등 여러가지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저녁에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벌어지는 '불금파티'가 특히 인상 깊었다.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로컬 인디뮤지션들은 물론이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시나위, 로다운30, 갤럭시 익스프레스 등등 대형 록페스티벌에서나 볼 수 있는 걸출한 뮤지션들의 공연을 무려 공짜로 즐길 수 있는 기회였다.

스테이지 앞에서 땀에 젖어 환호하는 골수 음악팬들 외에도, 마실 나온 동네 어르신들과 어린 아이들, 흥겨운 음악소리에 이끌려 모이는 행인들과 이주 노동자들, 사실 접근이 쉽지 않은 공연장이나 라이브 클럽과는 달리, 한자리에 모일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은 다양한 국적과 폭넓은 연령층의 관객들 모습 또한 스테이지 위에서 열정적인 공연 못지않게 흔치 않은 볼거리다. 캐리어나 여행가방을 들고 막 터미널을 빠져나오는 길에 공연을 구경하는 이들도 종종 있다. 어쩌면 이 풍경도 누군가에겐 부산의 첫 이미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와이에선 여기저기서 우쿠렐레 선율이 흐르고, 자메이카에선 레게 음악이 흐르듯, 부산에서 나고 자라며 음악을 만들어 온 로컬 인디뮤지션들이 뿜어내는 선명한 지역색이 녹아있는 강렬한 음악소리가 부산을 더욱 부산스럽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상 인디스테이션 입구.

사상은 부산에서 해외 이주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요즘 다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사상은 오랫동안 부산의 대표적인 공단지역이었다. 국내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3D업종이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들로 채워지며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최근 들어서는 현지에서 맛 본 강렬하고 이국적인 맛과 향을 찾아 이주민들이 운영하는 인도,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음식점들을 찾아다니며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주민들에겐 단순한 레스토랑이 아니라 서로 안부를 묻고 정보를 교환하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주말엔 고향 음식을 즐기러 온 외국인들로 붐비기 때문에 마치 해외로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서부 시외버스터미널 뒤 하이마트와 이마트 사이 골목으로 아시안 거리가 있다. 이곳이 바로 아시안 거리라는 사실을 주장하듯 길가엔 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기들이 걸려 있다. 여러 먼 나라에서 온 물품들을 진열해놓은 크고 작은 아시안 마트와 식당들이 모여 있다. 그 사이에 자그만 카페 같은 분위기의 다문화 나눔터도 자리 잡고 있다. 주로 이민자 가족들에게 한국어 교육과 더불어 낯선 한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큰 편은 아니라 '아시안 거리'라는 이름 때문에 이국적이고 낯선 풍경을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을 법 하다. 머지않아 아시안 거리의 벽면에는 다문화를 상징하는 벽화들로 채워질 예정이라고 한다.



아시안 마트를 둘러보며 쇼핑하는 것도 사상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상에 올 때 마다 빼먹지 않고 아시안 마트를 들리고 있다. 아시안 마트 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온갖 종류의 생소한 향신료와 과자, 음료, 라면 등의 인스턴스 식품과 커다란 두리안과 망고 등등의 열대 과일들을 둘러보고 있으면 여기는 마치 축소된 세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시안 마트에서 주로 사재기하는 건 한 쪽 매대를 가득채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각양각색의 봉지라면들이다. 종류별로 하나씩 맛보다 보면 간혹 게임 벌칙처럼 예상치도 못한 당혹스러운 맛을 경험할 때도 있다. 얼큰해 보이는 국물에서 상큼한 라임향이 난다거나,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하거나 재미난 맛을 접할 때도 있다. 그 또한 맛의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는 작은 모험일 것이다. 각종 포장육들로 가득 차 있는 냉장고에는 'HARAL'이라고 표기된 스티커가 붙은 고기들이 많다. 특히 무슬림들은 고기를 구입할 때 'HARAL'이라고 표기된 고기만 구입하는데, 도축할 때 신의 이름으로 코란을 암송하고 지정된 순서에 따라 메카 방향으로 도살된 고기라고 한다.

계산대 한 편엔 현재 우리나라에선 거의 사용하지 않는 각국의 전화 카드를 판매하는 매대가 있다. 이국의 언어들이 새겨진 알록달록한 전화카드를 보니 문득 예전에 읽었던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주민들의 수기가 담긴 책 '지구에서 온 편지'에 담긴 한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네팔에서 온 한 이주 노동자는 한국어를 할 줄 몰라 하루 종일 공장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만 하다 퇴근하는 길에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네팔 국제번호를 누르고는 아무 번호나 막 눌러댔다고 한다. 그러면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같은 안내 음성이 모국어로 흘러나온다. 그걸 듣고 싶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아무 번호나 눌렀다는 수기를 읽고 전화박스 안에 서서 한참동안 말 한마디 없이 서 있었을 어느 사내의 모습이 자꾸 떠 올라 오랫동안 가슴 한 편이 참 먹먹했던 기억이 있다. 여느 때처럼 라면 몇 봉지를 사들고 삼락공원으로 향했다.

사상 강변나들교를 산책하는 사람들.

삼락강변공원으로 향하는 길고 긴 강변나들교를 걷다보면 매년 8월마다 삼락공원에서 벌어지는 부산 록 페스티벌의 추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지금은 여름이면 록 페스티벌 열풍이라고 할 만큼 대한민국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록 페스티벌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2001년에 첫 회를 시작해 올해 17회를 맞은 부산 록 페스티벌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최장수 록 페스티벌이다. 그냥 나이만 많은 것이 아니라 좀처럼 보기 힘든 국내외 유명 록 밴드들이 총출동하는 어마어마한 라인업을 자랑하면서도 무려 공짜이기 때문에 전국의 록 팬들이 이 시기에 부산으로 몰려오고 있다. 물론 그간 시련도 많았다. 특히 2009년 다대포 무대에선 미국의 헤비메탈 밴드 오버킬이 무대에 오른 지 10여분 만에 곤히 주무시던 용왕님께서 굉음에 놀라 짜증이 나셨는지 무대 앞까지 밀물이 들이닥쳐 급히 공연이 종료되는 참사도 있었다. 부산 록 페스티벌은 광안리 해변에서 시작해 다대포 해변으로 옮겼다가 지금의 삼락강변공원에 자리 잡게 되었다. 국내외 밴드들이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굉음이 관객들에겐 축복이었지만, 인근 주민들에겐 고통이었는지 민원이 끊이지 않아 두 번이나 이사를 갈 수 밖에 없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낙동대교 아래 낙동강 둔치 좌우측으로 472만2000㎡로 광활하기 짝이 없는 면적을 자랑하는 삼락강변공원은 맘껏 악을 쓰고 떠들어도 좋은, 록 페스티벌을 위한 천혜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무료 자전거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계절에 따라 들판 가득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며 하이킹을 하기에도 캠핑이나 소풍, 데이트를 즐기기에도 그만이다. 특히 인적 드물고 은신할 수 있는 지형지물이 많으니 은밀하게 데이트하기에는 더욱 안성맞춤일 듯하다.

코스모스가 잔뜩 피어있는 삼락공원을 거닐다 어둑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갈색 피부의 외국인 청년이 빙긋 웃으며 가벼운 눈인사를 건넨다. 얼떨결에 같이 인사를 건네고 생각해보니 아까 들렀던 아시아 마트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던 것 같다. 승객들을 가득 실은 시외버스들이 줄지어 터미널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사상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과 멀리서 떠나온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수없이 마주치는 곳이다. 현재 고향에 살고 있는 나조차도 문득 삶이 낯설게 느껴져 당혹스러울 때가 많은데, 멀리서 낯선 언어와 낯선 문화로 가득한 곳으로 떠나온 이들은 얼마나 더 당혹스러울까. 어쩌면 그 중 가장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낯선 시선일지도 모른다. 사실 하나 하나 따지고 보면 다른 점 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더 많을 텐데 말이다.

방호정 소설가

공동기획: 동서대학교,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