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양 넉넉한 무딤이들 거닐면
- '토지' 속 서희가 된 듯한 감동
- 최참판댁서 조씨고가까지 4㎞
- 좁은 농로지만 정겨운 시골길
- 섬진강 따라 화개장터로 걷다
- 대나무·녹차밭길 만나면 황홀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무딤이 들은 지금 벼가 한창 익을 대로 익어 짙은 황금색을 띠고 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곳곳에서 벼를 타작하는 소리가 풍년을 알려주는 전령사의 요란함 같다. 274만 ㎡의 넓디넓은 황금 들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마치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인 서희 아씨가 돼보는 상상에 젖을 법하다.

악양 들은 도시의 요란함이나 경쟁을 잊고 오롯이 눈앞에 펼쳐진 들판에서 사람과 생명, 자연을 바라보는 자신만이 있는 경험을 하게 한다. 해서 느림을 즐기고 힐링을 만끽하려는 마음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무딤이 들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부부송 주변이 걷기행사에 참가한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황금색으로 물든 274만 ㎡의 광활한 들판 사이로 만들어진 박경리 토지길을 걷다보면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동군 제공

■토지길 시작, 섬진강변 평사리공원

'박경리 토지길'의 1코스는 평사리공원에서 평사리 들판을 지나 부부송~동정호~고소성∼최참판댁∼조씨고택∼취간림∼문암송~ 악양천∼평사리들판~섬진강변∼화개장터를 잇는 총 18㎞ 구간이다.

악양의 들머리인 평사리공원은 옛날에는 '개치나루'라 불렸고 섬진강을 따라 뱃길로 하동읍을 왕래했던 곳이다. 지금은 하동군이 쉼터와 함께 주차장, 편의시설이 있는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이곳에 차를 세워두고 국도 아래를 따라 10여 분 걸어가면 부부송이 있는 무딤이들로 들어선다. 부부송은 들판 가운데 30여m의 소나무 두 그루가 버티고 있어 이름 지어졌다. '서희와 길상의 나무'라고도 하지만 그냥 '아내와 남편'을 지칭하는 소나무다.

이후 당나라의 소정방이 중국 악양의 동정호를 축소시켜 놓은 것 같다 해서 이름 붙인 동정호를 둘러보고 악양루에 올라보면 평사리의 넉넉함과 풍성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평사리 들판에서 고소성을 가려면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높이는 해발 300여 m에 불과하지만 편히 걷는다는 마음으로 왔다가 30여 분 산길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숨이 턱 밑까지 찬다. 그러나 성벽 위에 올라보면 구렁이처럼 남으로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와 넓은 악양들판을 한눈에 내려다 보는 즐거움이 그만이다.

박경리 선생이 생전에 가끔 찾았다는 한산사를 거쳐 최참판댁으로 내려간다. 소설 속의 무대요, 드라마 촬영을 위해 2002년 완성된 최참판댁은 하동군이 전통 한옥으로 지어 대박을 터뜨렸다. 안채와 행랑채, 사랑채 등 10여 채가 조선 중기 때의 모습으로 지어진 데다 주변에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도 조성돼 있다. 입장료가 있지만 연간 45만~47만 명이 몰리는 관광명소가 됐다.

지난 5월 문을 연 박경리 기념관도 볼거리다. 유족들이 선생의 육필 원고 일부와 안경, 귀퉁이가 닳은 국어사전, 재봉틀은 물론 앨범이나 재털이까지 기증했다.

■느려야 더 아름다운 정겨운 시골길

최참판댁 전경.

최참판댁에서 정서리 조씨고가까지의 4㎞ 길은 그야말로 '내가 놀던 정든 시골길'이다. 자동차도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농로와 마을안길이어서 호젓하기가 그만이다. 길가에 늘어진 감나무에는 어른 주먹만한 대봉감이 주렁주렁 열려 어깨에 닿을 정도다.

조씨고가는 집주인이 일터로 나갔는지 굳게 잠겨 있었다. 영의정을 지낸 조준(1346~1405) 선생의 후손이 낙향해 살았던 집이지만 하동의 대표적인 상류층 주택으로 꼽힌다. 마을 안길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어릴 때는 그 집 주위로 부속건물들이 많았으나 전쟁과 관리 부실 등으로 없어졌다"고 귀띔했다.

정서마을 돌담길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을 더 찍고 취간림으로 내려왔다.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인공림으로 한국의 아름다운 마을숲 부문 우수상을 받기도 한 이 숲은 물가에서 물총새가 노는 숲이라고 해서 이름 지어졌단다. 숲 한쪽에는 항일투사 기념탑과 위안부라는 사실을 알리고 일본의 사죄를 요구했던 고(故) 정서운 할머니를 기리는 평화의 탑도 있다.

취간림에서 악양천을 따라 하천둑을 걷는 재미도 그만이다. 누렇게 익은 볏논을 보는 것도 즐겁지만 하천변의 갈대와 이름 모를 풀꽃들을 봐도 좋고 둑에서도 물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악양천을 봐도 신난다.

■섬진강따라 화개장터까지

다시 섬진강쪽으로 나온다. 평사리 공원 끝자락에서 이번에는 섬진강을 따라 9㎞에 이르는 화개장터로 향한다. 국도 19호선을 오른쪽에 두고 오르는 길은 시골길 그 자체다. 팽나무 쉼터나 두꺼비바위 쉼터같은 인공적인 쉼터가 곳곳에 있어 천천히 쉬어가는 코스로는 그만이다. 또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대나무 사잇길은 환상적이고 섬진강 모래톱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곳이 더러 있어 좋다. 특히 잘 다듬어진 녹차밭이나 야생화 산책길을 만나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다만 화개장터까지 9㎞ 가량이 국도와 나란히 조성돼 있어 대형 자동차가 지나가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 문화관광해설사 이정경 씨

- "봄여름가을겨울 모두 감동서린 길"
- 봄엔 매화·벚꽃, 여름 신록 환상
- 겨울은 눈 덮여 밀가루 뿌린 듯

"드라마 세트장으로 만들어진 최참판댁이 볼거리 역할을 제대로 했기 때문에 그간 관광 하동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특히 토지길을 걸어본 분들은 전국의 어느 곳보다도 환상적이라며 이내 다시 찾게 됩니다."

2007년부터 올해까지 10년간 문화관광해설사를 맡고 있는 이정경(여·53·사진) 씨는 "토지길의 아름다움은 계절마다 분위기를 달리하며 감동을 준다"고 자랑한다. 이 씨는 "지금은 가을이어서 황금색 들판을 볼 수 있지만 겨울에는 밀가루를 뿌린 듯 들판을 온통 덮은 눈을 보면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한다"며 "눈 덮인 부부송이나 철새들이 찾아온 동정호를 바라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고 덧붙였다. 또 봄이 되면 지천으로 핀 매화와 벚꽃은 물론 산수유와 배꽃 등이 만개해 장관을 이루고 더운 여름에는 신록을 즐기려는 사람이 많다고 설명했다.

하동군도 박경리 토지길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고 귀띔한다. '슬로시티 하동'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제2의 최참판댁 건립을 추진하고 작가를 희망하는 문인들에게 영감을 심어주기 위한 집필실도 활성화해 제 2, 3의 박경리가 탄생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토지길이 시상(詩想)을 가다듬거나 소설의 모티브를 찾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씨는 "박경리 토지길은 섬진강과 지리산을 끼고 있는 악양들판과 최참판댁이나 박경리문학관이라는 문학적 분위기를 고루 갖추고 있어 전국 제일의 걷기코스로 각광받고 있다"며 "전체 거리가 18㎞여서 하루를 꼬박 할애해야 하는 코스지만 '서희 아씨와 길상'이 되어보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으로 자신한다"고 말했다.

이완용 기자 wyle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