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문인화에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가 아닌 바나나 잎이 그려지기도 했다. 바로 파초(芭蕉)다. 정조도 파초도를 그렸다. 김홍도 신윤복 정선 심사정 장승업은 파초가 있는 풍속화, 춘화를 그렸다. 넓은 잎을 가진 파초의 이국적 모습은 예술혼을 자극했다. 김동명은 '파초'라는 시로 나라 잃은 설움을 표현했다. 문정선은 '파초의 꿈'처럼 일어설 희망을, 수와진은 '파초'처럼 살 것을 노래했다.

파초와 관련된 그림이나 노래가 있어도 파초는 한국인에게 생소하다. 열매를 맺지 못해서다. 우리나라에서 야자수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열대 땅에서 파초는 초황(蕉黃)으로도 불리는 열매인 파초실(芭蕉實), 즉 바나나를 맺는다. 그러니 온대 지역인 한국에서 바나나는 초고가 희귀 과일이었다. 1991년에 세상이 뒤집혔다. 바나나 수입제한이 풀렸다. 엄청난 물량의 바나나가 들어오며 저렴한 국민 과일이 되었다.

바나나는 나무처럼 보이는 다년생 풀에서 열린다. 수분(受粉)을 통해 생기는 씨가 없어도 번식할 수 있다. 바나나 수확 후 어린줄기의 뿌리를 옮겨 심으면 또 자란다. 무성생식으로 재배되는 바나나는 하나의 씨로부터 퍼진 단일 품종 바나나다. 유전적 다양성이 없다. 치명적 역병이 돌면 몰살당한다. 1950년대에 그로스 미셀 품종의 바나나가 사라졌다. 지금 캐번디시 품종의 바나나도 위기다. 또 멸종해도 인간은 또 다른 씨 없는 바나나를 만들어낼 것이다. 여전히 바나나의 생명체 건강성은 취약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 세상은 요란하지만, 생태계는 조용히 심상치 않다.

경성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