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화마을~배방사지 10㎞ 길
- 고려 태조 아들 왕욱의 귀양지
-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던 처지라
- 훗날 현종된 아들 절에 맡겨두고
- 매일 고개 넘어 만나러 다녀와

- 숲길과 임도로 이어지는 코스
- 4시간 가량 쉬엄쉬엄 걷기 좋아
- 고자실 마을 담벼락엔 벽화 조성

우리나라 지도상 남쪽 중앙에 있는 경남 사천이 '풍패지향(風沛之鄕·왕의 고향)'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고려 태조 왕건의 여덟 번째 아들인 욱(郁)이 개성에서 이곳까지 귀양 왔다가 죽었는데 이곳에서 두 살배기 아들 순(詢)을 4년여 동안 가까이 두고 길렀다. 훗날 왕이 된 아들은 짧은 기간이지만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은혜를 베푼 땅이라 해서 진주목에 속해 있던 작은 고을 사수현(泗水縣)을 사주현(泗州縣)으로 승격시켰다. 당시 전국에는 12개주(州)만 있었으니 파격적이었다.

	경남 사천 시티투어에 나선 관광객들이 고자실로 불리는 정동면 학촌마을 벽화 앞에서 문화관광해설사에게 고려 안종(욱)과 현종의 애틋한 상봉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완용 기자

아버지 욱은 사수현(지금의 사남면 부근)으로 귀양 와 살았는데, 죄인은 귀양지에서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게 했으므로 아들 순을 이곳에서 10㎞가량 떨어진 배방사(排房寺)에 맡겨 키웠다. 이 때문에 욱은 능화마을에서 고자봉을 넘어 대산마을에 있는 배방사를 찾아 아들을 만나는 즐거움으로 하루를 지내다가 날이 저물면 다시 거처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귀양지임에도 아침이면 외아들을 만나는 설렘으로 고개를 넘었다가 해가 저물면 귀양지로 돌아가던 중 아들이 있는 배방사를 뒤돌아보며 눈물지었다는 길. 아비와 자식의 만나고 헤어지는 애틋함이 묻어 있는 그 길이 요즘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바로 '부자상봉(父子相逢)길'이다.

■ 능화마을에서 욱의 묘터까지

부자상봉길은 외길로 돼 있어 승용차를 이용하는 탐방객은 어느 쪽에서 시작해도 왕복 걸음을 해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그래도 산길이 잘 만들어져 있어 3~4시간의 가벼운 걷기코스로는 안성맞춤이다.

사남면 능화마을에서 안종으로 추존된 욱의 묘소 터와 고자정~고자실~대산마을~배방사지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자동차로 고자실인 학촌마을까지 갔다가 여기서 고자정~ 묘소 터(안종 능지)~능화마을을 돌아온 뒤 대산마을까지 승용차로 이동해 배방사까지 걸어갔다가 돌아가는 코스도 괜찮다.

능화(陵花)라는 마을 이름은 뒷산에 현종의 아버지 욱(안종 추존)의 묘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지금은 묘가 개성시 개풍군의 건릉(乾陵·뒤에 무릉으로 개칭)으로 옮겨지고 터만 남았지만, 당시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으로 알려졌다. 욱은 죽기 직전 이 마을 남쪽 귀룡동에 매장하게 하되 반드시 엎드리게 하여 묻으라(伏屍而葬)고 당부했다.

능화마을에서 이곳까지는 잘 만들어진 임도여서 20여 분이면 닿는다. 안종 능지라는 안내판에서 묘터까지의 200여 m는 길이 험하고 급경사여서 숨이 몹시 가쁘다. 그러나 주변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란 편백림이 있어 힐링에 그만이다. 또 지금은 흔적만 남은 묘터지만 개성에서 이곳까지 유배 온 왕족의 최후를 헤아려 보기에 충분한 곳이다.

■ 눈물 속 뒤돌아본 고자정과 고자실

	고자봉에 세워진 고자정.

묘터에서 내려와 다시 임도를 따라 10여 분 올라가면 고자봉(顧子峰·아들을 되돌아 보는 봉우리)이 나온다. 이곳에는 사천시가 지난해 정자(고자정)와 포토존을 만들었다. 땀을 식히거나 간식을 먹고 쉬어가는 장소로는 그만인데, 욱이 아들이 있는 곳을 뒤돌아보았다는 배방사는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고자정에서 고자실로 불리는 학촌마을까지 3㎞가량은 잘 정비된 임도를 따라 걷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조용하고 깔끔하게 정비된 길을 걷다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즐거움도 즐거움이려니와 '외아들을 만나러 가는 아비의 마음'이 읽혀 가슴이 뭉클해진다. 혼자 걷기에는 아깝고 둘이 걸으면 차분한 분위기를 깰까 봐 신경이 쓰이는 코스다.

조용했던 고자실 마을은 요즘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천시가 욱과 아들의 스토리를 벽화로 탈바꿈시켜 마을 담벼락을 장식했기 때문이다.

■ 현종이 살았다는 배방사지

고자실에서 배방사 입구인 대산마을까지 2㎞가량은 평평한 농로를 통해 이동한다. 조금 둘러서 가더라도 사천강을 따라 만들어진 둑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지금의 정동면 장산리 대산마을의 뱅잇골에 있는 배방사터는 마을에서 4㎞가량 올라가야 한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보니 마을 안길이 옛길 그대로여서 배방사터 방향을 찾으려면 신경을 써야 한다. 주민들을 만나면 물을 수 있지만 농촌 마을에서 길을 물을 사람조차 만나기 쉽지 않다. 어렵게 찾은 배방사길은 좁고 비탈길인데, 부지런한 마을 주민 덕분에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배방사지는 그 옛날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위엄이 있어 보였으나 칡넝쿨과 잡목이 뒤엉켜 절터임을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이곳에는 가야시대 때부터 전해지는 황차를 재현하기 위해 한 주민이 집을 짓고 작업장을 만들었다가 실패한 뒤 폐허로 남아 있다.

지난 22일 시티투어에 참가했던 김영은(여·53) 씨는 "왕이 어린 시절을 우리 고장에서 보내 풍패지향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며 "아들을 그리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 보며 걷는 부자상봉길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완용 기자 wyle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