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 봉황동 유적지서 출발
- 수로왕릉까지 5㎞ 역사코스
- 왕 탄생설화 담긴 구지봉 등
- 발길 닿는 곳이 모두 박물관
- 애틋한 전설에 마음도 힐링

고구려 신라 백제 등 고대 삼국에 가려진 채 홀연히 사라진 가야를 흔히 '신비스런 나라' 또는 '잃어버린 왕국'이라고 부른다. 신라에 흡수된 뒤 삼국유사 등 일부 기록에만 있을 뿐 가야 관련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야고도' 경남 김해시를 찾아 트레킹에 나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도시 자체가 거대한 가야 관련 문화재이자 박물관인 까닭이다. 김해 시내 한복판을 걷는 '가야사누리길'은 가야 문화의 정수를 올곧게 알 수 있는 최적의 코스로 꼽힌다. 유물, 유적지와 대면하는 즐거움은 물론 수로왕과 왕비의 러브 스토리, 애틋한 전설들과 마주할 수 있다.

금관가야 시조의 능인 수로왕릉(사적 제73호).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800m 거리에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의 수로왕비릉(허황후릉·사적 제74호)이 있다.

■ 거대한 해상왕국이던 가야

가야사누리길은 김해 봉황동 유적지~수로왕릉~수릉원~대성동고분박물관~시민의종~국립김해박물관~구지봉~수로왕비릉~김해읍성 북문~김해전통시장~수로왕릉에 이르는 5㎞ 구간. 가야의 진수를 보고 느끼기에 안성맞춤인 이 코스는 걸어서 2시간 정도면 된다.

출발점은 봉황동 유적지(사적 제2호)다. 가야시대 고상가옥, 망루, 배 등이 실물처럼 재현돼 있다. 이 일대는 2000년 전 수많은 외국 선박이 드나들던 무역항이었다. 인근 해반천을 따라 이곳에 도착한 왜나 중국 상인들은 가야의 발달된 철 장신구나 토기 등을 사들였다. 당시 중국 동전 형태의 화폐가 쓰였는데, 이는 인근에 있는 가야패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남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자 20m 높이의 벽면에서 크고 작은 조개와 동물 뼈 등이 촘촘히 박혀 있는 패총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토기, 동물 뼈와 중국의 화폐 등이 발굴 조사됐다.

패총이 있는 야산에서 총총걸음으로 내려와 30분을 더 걸으면 금관가야 시조의 능인 수로왕릉(사적 제73호)의 웅장한 자태와 만나게 된다. 왕릉은 수차례 개축됐으며, 조선 중기에는 영남 관찰사이자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의 부친인 허엽이 중수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800m 떨어진 구지봉 옆에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의 수로왕비릉(허황후릉·사적 제74호)이 있다.

■ 러브스토리에다 먹거리까지

수로왕릉에서 나와 동상동 쪽으로 걷자 맛집이 즐비한 김해전통시장이 나온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이곳은 한때 쇠락을 길을 걸었지만 김해지역 7000여 기업체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전통시장 주변인 동상동 로데오거리를 즐겨 찾으면서 완전히 되살아났다.

김해 최초의 다문화가구인 인도의 허황옥이 시집오면서 가야가 번성했듯, 이제는 동남아 등지 근로자들이 김해 중심가를 되살리고 있는 셈이다. 다문화 도시 김해시를 둘러싼 질긴 인연의 끈 같은 게 느껴졌다. 문화관광해설사 김선옥(53) 씨는 "이곳에는 칼국수가 특히 유명하다. 국수 위에 고명으로 잡채를 얹는 게 포인트인데 진한 육수와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자 김해읍성 북문이 고색창연한 자태를 드러낸다. 세종 16년(1434년)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이 문은 모두 불에 타 없어졌는데, 김해시가 수년 전 복원했다. 김해읍성에는 원래 남문 서문 동문 등 4대 문이 모두 있었다고 한다.

김해향교를 지나 다시 북쪽으로 걸어가자 수로왕비릉이 단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능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2000년 전 머나먼 인도 아유타국에서 공주의 몸으로 시집온 이의 생애가 떠오른다. 김해 허씨의 시조인 허황옥은 수로왕과의 사이에 아들 10명과 딸 2명을 두었다. 아들 2명은 왕비 성(姓)을 따르게 한 것으로 볼 때 왕비에 대한 왕의 애틋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수로왕비릉 옆 구지봉(사적 제429호)은 수로왕의 탄생 설화를 담고 있는 성지이다. 구지봉 한 쪽에 있는 구석기 시대 고인돌 위에는 명필 한석봉의 작품으로 알려진 '구지봉석'이라는 글귀를 볼 수 있다.
■ 문화재 발굴작업 한창

수로왕비릉과 구지봉을 뒤로 하고 걸어가니 가야시대 유물 전시로 특화한 국립김해박물관이 나타났다. 마제석기, 철제갑옷, 토기 등 수많은 유물을 통해 가야의 혼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이어 해반천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면 가야시대 토기 등을 형상화한 시민의 종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성동고분군 및 박물관과 김해민속박물관을 잇달아 둘러본 뒤 수로왕릉 인근에 있는 한옥체험관을 찾아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청하는 것도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좋은 방법이다.

김해지역은 전체가 문화재의 보고다. 현재 김해시와 문화재청이 시내 곳곳에서 발굴조사를 진행 중이다. 높이 20m 구릉에 있는 대성동 고분군(사적 제341호)은 1990년 발굴조사 당시 90기의 고분이 확인된 바 있다.

김해의 심장부인 봉황동 유적지 발굴조사도 관심사다. 문화재청이 수로왕릉 궁궐터 발굴을 추진 중인데, 관련 유물이나 유구가 확인될 경우 금관가야사를 획기적으로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장유동 유하패총 발굴조사 등도 이뤄지고 있다.


# 파사석탑·쌍어문양·장군차…아유타국 공주의 혼수였대요

- 인도서 배에 싣고 왔단 전설, 차 씨앗 심어 김해명차 탄생

수로왕비릉 오른쪽 누각에 있는 파사석탑.

김해지역 가야시대 유물 중 유독 허황후와 관련된 게 많다. 파사석탑 쌍어 장군차 등이 그것으로, 모두 인도 아유타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유물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파사석탑의 경우 허황후릉(수로왕비릉) 오른쪽 누각에 있는데, 기존 직각 형태의 석탑과는 달리 둥근 돌을 포개 놓은 모양으로 5층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AD 48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시집올 때 배에 싣고 왔으며, 이 탑의 신묘한 힘으로 인해 모진 파도를 이겨내고 이역만리 김해 땅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김해 허씨 후손인 김해 금강병원 허명철 원장이 수년 전 파사석탑 조각으로 불을 붙이는 실험을 했는데, 유황 냄새가 나는 등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는 성분으로 판명 났다고 동행한 문화해설사가 전해줬다.

또 쌍어는 두 마리 물고기를 뜻하는 것으로, 인도 아유타국의 건물 등에 문양 형태로 많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로왕릉 정문 처마에도 쌍어 문양이 새겨져 있다.

김해시 대동면 주중리 장군차밭.

장군차는 김해 특산차로, 허황옥이 시집올 때 인도에서 씨앗을 가져와 심은 것으로 전해졌다. 허황후릉에서 구지봉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일부 볼 수 있는데, 고려 충렬왕이 김해지역에 자라고 있던 차나무를 가리켜 '장군수(將軍樹)'라고 불렀던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장군차는 남방계 대엽류로 다른 녹차보다 잎이 크고 두꺼워 아미노산 미네랄 등 무기질류 함량이 많고 뒷맛이 깔끔하다. 최근 8년 연속 '대한민국 올해의 명차'에 꼽히기도 했다.

김해시는 허황후 고향으로 알려진 인도 아요디아시와 16년 전인 2000년부터 자매결연을 해 각종 교류사업을 펼치고 있다. 김해시 김미경 문화관광사업소장은 "아요디아시에는 우리 시가 세운 허황후기념비가 있으며 해마다 김해 허씨 문중에서 아요디아시를 찾아 '사돈 나라'와의 우의를 다지고 있다. 최근에는 아유디아시가 속한 유피(UP)주와의 관광교류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동필 기자 feel@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