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여름 금정산 부채바위를 오르던 중 일행에게 손을 흔드는 배종순.

- 태종대서 1년간 합숙 훈련
- 동계 한국 초등 중 조난사

- 설악산 토왕성 빙벽 개척
- 빙폭 초등에 이바지 하고
- 금정산 부채바위 '번개길' 등
- 지역에 많은 암벽코스 남겨

아이거(3970m) 북벽이 어둠에 싸일 무렵 구조를 요청하는 횃불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시속 80㎞의 강풍으로 구조헬기를 띄울 수 없었다. 다음 날 밤새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잠시 기세를 죽이자 사력을 다해 정상을 향하는 두 대원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다시 짙은 가스가 휘감고 돌자 두 사람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날 밤부터 혹독한 폭풍설이 아이거를 뒤덮었다.

부산 엑셀시오알파인클럽 등반대가 알프스 3대 북벽(아이거, 그랑드조라스, 마터호른) 동계 연속 등반에 도전, 먼저 배종순 김원겸 2인조가 아이거 북벽을 오르다 악천후로 조난당한 소식이 국내에 전해진 것은 등반 시작 8일째인 1986년 12월 18일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이거봉 조난 한국인, 안전하게 대피 중'이라는 잘못 전해진 속보가 나왔다. "그러면 그렇지, 쉽게 죽을 놈들이 아니다"라고 그들을 익히 아는 산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했다. 그것은 남다른 체력과 기술의 소유자였던 두 사람의 생존을 바라는 산 친구들의 바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동료들이 구조에 나섰으나 악천후로 물러섰고, 일주일 뒤 폭풍설이 잦아진 틈을 타 헬기로 수색했지만 눈이 설벽을 덮어 이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눈물로 귀국한 대원들이 이듬해 다시 아이거 북벽을 찾아 배 대장의 시신을 정상부에서 발견했다. 조난당한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곳은 정상 아래 200m 하얀 거미 상단부. 애초 그때의 상황을 미뤄봐 조난지점 부근에서 로프에 매달린 채 숨진 것으로 추측됐다. 하지만 생과 사의 극한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 정상을 밟은 뒤 숨을 거둔 것이다. 산 사나이다운 장렬한 최후였다. 그러나 김원겸 대원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해 통한의 아쉬움을 남겼다.

사망자가 속출해 '클라이머의 공동묘지'로 불릴 만큼 험난한 아이거 북벽은 수직에 가까운 높이 1800m의 암벽이다. 등반대는 악조건을 고루 갖춘 '마의 거벽'을 극복하려고 1년간 태종대에 합숙소를 차렸다. 매일 20㎏의 배낭을 지고 해벽을 오르고 스쿠버다이빙으로 체력을 다졌다. 한겨울에 바다에 들어갔다가 해변에서 좌선하며 추위를 이겨냈다. 특히 배 대장은 적응을 위해 겨울에는 반바지를 입었고, 여름에는 겨울용 장갑을 끼고 암벽을 올랐다. 심지어 잠꼬대로까지 아이거를 꼭 오르겠다고 다짐했다.

아이거 북벽 동계 한국 초등에 성공했지만, 조난사라는 슬픈 기록을 남긴 배종순(1949~1986). 그는 부산 산악계에서 보기 드물게 평판이 좋았던 클라이머였다. "산과 비교해도 좋을 만큼 마음이 넓다", "한 세대를 앞선 눈으로 후배들을 이끌었다"는 등의 찬사가 그의 죽음 훨씬 이전부터 주어졌다. 호방하고 다변이었던 그는 노래와 그림, 시와 글쓰기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산악인이었다.

부산 동구 초량에서 태어난 그의 산악 인생은 1969년 동아고를 졸업한 뒤부터 시작됐다. 암벽과 빙벽등반의 기술 습득과 보급을 목표로 1972년 산악회를 창립, 독일어로 친구 전우 등의 뜻을 가진 '카메라트'라 이름 붙였다. 초대 회장을 맡아 서길윤 황보덕 송유천 회원 등과 함께 1974년 금정산 부채바위에 '번개길'을 개척했다. 1976년부터 엑셀시오알파인클럽과 팀워크를 이뤄 등반열을 불태우며 부산·경남 일원에 많은 암벽코스를 남겼다. 특히 전인미답이던 설악산 토왕성 빙벽 개척에 온몸을 던졌다.

모험적 등반을 시도하는 알피니즘이 우리나라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다. 하지만 국내에는 그 대상지가 없었다.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국 알피니즘의 수준은 일부 암장에서의 기교적인 등반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 대상지가 딱 한 곳 남아 있었는데, 등반 높이 300여 m의 설악산 토왕성 빙벽이었다. 당시 이 빙벽을 오르는 것은 히말라야 8000m급 거봉 등반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평가됐지만, 장비나 기술 면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1976년 일본대가 하단을 돌파하고 상단 3분의 1지점까지 올랐다. 이에 국내 등반가들은 독립투사에 버금가는 전의를 불태우며 1977년 1월 토왕골로 모여들었다. 부산합동대를 비롯해 서울의 동국대, 에코클럽, 크로니산악회 팀이 그들이다.

부산합동대는 배종순을 주축으로 강창호 김문식 김원겸 한성진(엑셀시오알파인클럽), 권경업 이종량(부산크라이머스), 이정희 이정호(청봉산악회) 등 9명으로 조직됐다. 훈련 장소가 없어 냉동 창고를 빌리거나 나무 전봇대를 오르며 빙벽 기술을 익혔다.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아이스 훅과 볼트, 위아래가 붙은 일체형 안전벨트를 직접 만들었다. 또 초등을 노리던 서울의 세 팀과 초등 우선순위를 협상했다. 비록 부산합동대가 크로니산악회에 이어 두 번째로 올랐지만, 토왕성 빙폭 초등에 이바지한 그의 공은 지대하다.

순수 알피니즘 추구를 위해 젊음을 불태우다 37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결코 허무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의 고귀한 희생은 부산 등반계의 성장과 발전에 밑거름이 됐다.

거벽 등반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정과 순수했던 영혼은 부산 클라이머들의 요람인 금정산 여러 암장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부산산악연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