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0월 부산운봉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경북 백암산을 오른 김억석(맨 왼쪽) 선생.

- 1989년 삼천리그룹이 시도
- 서명운동 등 벌여 무산시켜
- 사격장 건립 백지화에 기여
- 자연보호 '전도사'로도 활약

'부산의 산'하면, 누구나 금정산을 떠올린다. 높고 깊지는 않지만 빼어난 경관과 우수한 조망을 갖췄다. 금정산은 부산 시민의 쉼터로, 등산과 레저 활동의 공간으로, 때론 체력을 단련하고 호연지기를 키우는 교육장으로 활용된다. 이처럼 금정산은 시민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지만, 눈만 뜨면 바라보이는 만큼 너무 가까이 있기에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어 대부분 그 소중함을 미처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400만 부산 시민의 공원이자 휴식처인 금정산을 시민 스스로 보존하고 가꾸자는 '금정산 골프장 조성 반대운동'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금정산의 진정한 매력과 역사적 문화적 환경적인 가치를 깨닫게 된다. 이 운동을 이끈 주역은 1970년대 대한산악연맹(대산련) 부산연맹 부회장을 맡아 산악정화운동에 앞장섰던 김억석(1921~2003) 선생이다. 선생은 "어떤 일이 있어도 금정산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며 온몸을 던져 금정산을 지켜냈다.

국내 굴지의 석탄재벌인 삼천리그룹은 1989년 금정산성 내 90여만 평의 임야에 골프장을 조성하겠다는 사업신청서를 부산시에 접수했다.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선생은 대산련 부산연맹에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는 진정서를 제출토록 건의하는 한편, '골프장 건설허가 반대서명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선생은 칠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대산련 부산연맹과 한국산악회 부산지부의 소속단체 회원들과 함께 금정산 등산로 입구와 시내에서 서명운동을 벌였다. 예상외로 강력한 반대여론이 일자 삼천리그룹은 사업 신청을 철회했다.

그 후 포기한 줄 알았던 골프장 사업은 중앙에서 로비를 벌인다는 소문이 나돌더니, 이듬해 다시 사업신청서가 부산시에 전격 접수되면서 되살아났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범시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대산련 부산연맹은 한국산악회 부산지부, 부산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 등 23개 단체로 '금정산 골프장 조성반대 범시민추진위원회'를 결성, 위원장에 선생을 추대했다. 선생은 추진위원들과 함께 서명운동을 벌이는 한편, 부산시와 국회 등에 진정서를 보내 골프장 건설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분별없는 기업과 행정당국의 골프장 건설계획은 결국 부산 산악인들의 용기 있는 반발에 밀려 백지화됐다.

당시 국내 언론은 '우리나라 금수강산 보전사에 길이 기록될 쾌거'라고 선생의 인간승리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산운봉산악회 후배로 선생의 활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 박성동 전 동아일보 기자는 "하루가 멀다고 부산시청 기자실에 찾아와 반대운동의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 도움을 청하는 김 선배의 열정에 감동해 관련 공무원도 소개해 주고 서명운동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자문도 해줬다"며 회고했다.

그 후 범시민추진위원회는 금정산을 영원히 보존하고자 조직을 개편, 1991년 '범시민 금정산보존회'를 탄생시켰다. 초대 회장에 추대된 선생은 '금정산은 마음의 고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환경보호 캠페인과 함께 금정산의 생태계와 오염실태 조사를 벌였다. 또 시민단체와 연대해 국제 규모의 사격장을 건립하려던 부산시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등 금정산 자연보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금정산을 '부산시립공원'으로 지정하자는 범시민운동을 추진, 공원 지정에 최대 걸림돌인 70만 평의 사유지 매입 운동을 펴기도 했다.

선생은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경성철도학교를 나와 10여 년간 철도 공무원으로 봉직하다 동성전기사를 창업해 적잖은 재산을 모았다. 건강이 나빠져 절망에 빠진 적도 있었으나, 등산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그 후 1970년대 중반 부산운봉산악회에 들어가면서 만사를 제쳐놓고 산에만 몰두했다. 주말이면 금정산에서 쓰레기를 줍는 등 자연보호를 몸소 실천했다. 특히 배낭에 쓰레기봉투 2개를 항상 넣고 다녔는데, 이후 '배낭 두 개 갖기 운동'으로 발전했다. 또 '산에 자동차 안 가져가기 운동'을 벌여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도 일조하는 등 자연보호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러한 공로로 1986년 금정대상을 받은 선생은 "산을 오르며 산이 내게 건강을 허락해 준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나만이 즐기는 산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자연이 베풀어주는 갖가지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자연보호운동에 앞장선 연유를 밝혔다.

젊은 시절 씨름으로 이름을 날렸던 선생은 이순을 넘긴 나이에도 유럽 알프스 산군 탐사를 비롯해 킬리만자로, 일본 북알프스 등 해외 원정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후배들의 본보기가 됐다. 특히 1984년 안나푸르나 산군을 탐사했고, 이듬해 울산지역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인 히말출리 북봉(7371m) 세계 초등 원정대의 단장을 맡아 65세의 나이에 5800m까지 진출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오늘날 금정산이 '부산의 허파'로서 매연으로 찌든 부산에 그나마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을 안겨주는 소중한 휴식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의 덕분이 아닐까. 금정산 자연보전에 인생을 바친 선생은 노환으로 2003년 82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부산산악연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