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 1호기 끄고, 핵 없는 세상 켜자！" 

8일 천현진(여·34) 씨는 엿새째 부산 부산진구 도시철도 서면역 지하보도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원전의 위험성을 설명하는 널빤지를 들고 서 있지만, 대다수 시민은 천 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쳐버렸다. 얼마 후 지나가던 한 나이지긋한 남성이 다가섰다. 그는 "원전 없으면 뭐로 전기를 만드나"라며 오히려 천 씨를 다그쳤다. 천 씨는 원전의 위험성과 지속가능한 에너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남성은 "대안에너지 개발이 시기적으로 이른 탓에 원전은 꼭 필요하다"고 맞섰다.

■반핵 활동가들 '원전 NO'

천 씨의 직업은 웹프로그래머이다. 평범한 직장인인 그가 이렇게 나선 데는 이유가 있다. 천 씨는 지난해 5월까지 일본 요코하마에 머물렀다. 현지에서 후쿠시마 사태의 후폭풍을 생생히 경험했다. 치솟는 물가와 오염된 농산물에 대한 우려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불신이 팽배해진 사회는 참기 어려웠다. 후쿠시마 지역 출신 사람이 이웃이 되지 않을까 불안에 떨었고, 이들이 이사 오면 어김없이 따돌림을 당했다. 또 이 지역 여성은 출산을 꺼렸고, 이혼까지 당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그가 머무른 요코하마에서 후쿠시마까지 거리는 150㎞가량인데 반해 고리1호기에서 부산시청까지는 불과 25㎞. 고향 부산에 돌아온 천 씨는 '예삿일이 아니다'고 느꼈다. 히로시마 원폭 경험이 있었던 일본은 철저한 대비를 했지만 처참히 당했다. 원전과 인접한 부산은 그 어떤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라도 나서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에너지정의행동'이라는 단체에 가입해 원전 반대 활동을 하고 있다. 방사능 측정기로 부산 곳곳에서 수치를 측정했다. 호텔과 식당, 자신의 집 건물에서도 다량의 방사능이 검출됐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시민단체들도 40여 개 모여 반핵부산시민대책위를 꾸리는 등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지만 정작 시민 반응은 미지근하다. 반핵대책위는 시민과 정부의 원자력 안전불감증이 심각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부산녹색연합 김승홍 간사는 "원전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인지 원자력의 위험성을 시민이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대체에너지를 개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원자력 추가 설치에만 돈을 쏟아붓는 정부도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산은 머리맡에 원전이 집중돼 있는데도 오히려 원전이 없는 서울보다 핵 위험에 대한 관심이 적다. 한 환경단체 관계자는 "서울에는 반핵단체인 '세이브 차일드' 활동이 매우 활발하지만, 부산지역에서는 소수의 활동가밖에 없다"고 말했다. 세이브 차일드는 방사능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어머니들의 모임으로 전국 각지에서 6000명 이상이 활동 중이다.

■'핵단지' 끼고도 시민들 무심

1년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참사가 발생했을때만 해도 방사능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열기는 대단했다. 요오드화칼륨(KI)은  방사능 오염 치료제로 알려지면서 불티나게 팔렸고, 해독제 성분이 포함된 기장 미역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방독면의 판매량은 전달보다 500% 증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모(여·20·부산 반송동) 씨는 "지난해 일본 원전 참사 때 걱정이 많이 됐던 것이 사실이지만 원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정부가 더 많은 지원을 해 안전한 원전을 만들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모(여·47·부산 거제동) 씨도 "예전에는 일본산 제품을 사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며 "철저한 예방이 필요하지 '반핵'에 나설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 역시 원전에 대한 애착은 집요하다. 일본에서 대규모 원전사고가 있었지만 정부의 원전 정책은 변한 것이 없다. 오히려 정부는 2030년까지 현재의 배 수준인 42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설치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원전의 전력 분담율도 현재 34%에서 59%까지 끌어 올리겠다는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이 같은 방침이 예산 낭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핵부산시민대책위원회 서토덕 사무처장은 "정부가 국내 원전 사업 외에 모두 30기의 원자력 발전 설비를 수출할 계획으로 엄청난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며 "반면 전 세계는 탈핵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어 괜히 헛돈을 쓰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