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율배반 행보에 부산 분개

한진해운의 국내 최대 채권자인 산업은행이 현대상선 대주주 자격으로 전 세계 고객에게 한진해운의 파산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으로 의심받을 만한 문건을 보내 파문이 일고 있다. 특히 문건 발송일이 긴급 하역자금 500억 원 지원을 결정하기 하루 전인 지난 21일이어서 지역 해운업계에서는 산업은행이 겉과 속이 다른 행보를 하고 있다며 분개하고 있다.

23일 본지가 입수한 '현대상선 고객들께(Dear HMM's Valued Customers)'라는 제목의 영문 편지에서 산업은행은 우선 자신들이 현대상선의 최대 주주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문건은 이어 "한진해운의 '파산 과정(bankruptcy proceeding)' 뉴스들로 인해 겪는 고객들의 우려와 당혹감을 잘 알고 있다"며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의 재무 구조조정과 안정화를 위해 강력히 지원하고 있고…, 새로운 소유체제 하에서…, 재정 및 운영 안정성과 견실한 성장성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산업은행은 "한진해운의 파산(bankruptcy)에 따른 심각한 글로벌 해운 위기 기간,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 속에 현대상선이 대한민국 국적 원양선사로서 물류 위기를 완화하고 믿음직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와 국책은행이 현대상선을 강력히 밀어준다는 시그널로 읽히는 대목이다.

지역 해운업계와 전문가들은 이 문건에서 2차례 나타난 '파산(bankruptcy)'이라는 용어와 '한국정부와 긴밀한 협력' 등의 표현은 결국 한진해운의 파산을 외국 화주들에게 기정사실화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특히 외신에서도 사용하는 '법정관리(court receivership)' 대신 '파산(bankruptcy)'을 쓴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현재 법정관리 중인 한진해운은 오는 12월에 회생과 파산을 결정하는 재판을 받게 되며, 미국 등 외국 법정에서조차 이달 중순 '파산 보호(bankruptcy protection)' 신청이 받아들여진 상태다.

한 지역 선사 간부는 "지난달 한진그룹의 '4000억+1000억 원' 자구책을 외면하고 추가 자금 대출 불가를 주도했던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의 대주주라는 사실, 그리고 현대상선의 최대 라이벌 선사가 한진해운이라는 점이 겹쳐져 의구심이 든다"며 "정부와 산업은행은 이미 한진해운 파산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음이 드러났는데 부산시민들은 촛불집회와 서명으로 맞서고 있다"고 통탄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현대상선 고객들에게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쓴 편지"라며 "'bankruptcy'라는 표현은, 법원이 최근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이대로 가다가는 파산을 피할 수 없다'는 언급을 했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지 한진해운 파산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