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행사로 버텨보지만- 지난 2일 부산 동구 좌천동 가구거리 내 한 가구점이 최대 65% 할인 판매한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있다. 김성효·전민철 기자

① 불황에 비싼 장롱·침대 안 사

- 성수기에도 침구 등 소형 수요만
- 경비 줄이려 직원들도 다 내보내

② 싼 걸로 자주 바꾸는 트렌드

- 대물림 칠기…좌천동 1곳만 명맥
- 이케아 등 패스트 리빙은 급성장

③ 과거 독점지위 때 불신도 한몫

- "브랜드 믿고 샀는데 중국 짝퉁"
- 상인 자발적 활로 모색 소홀해

올가을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 최홍철(30·부산 사상구 엄궁동) 씨는 혼수용 가구 구입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결혼식 비용도 만만찮은 데다, 전셋집이라 이사를 고려했을 때 고가의 대형 가구를 들여놓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최 씨는 "식탁이나 붙박이장은 아파트에 기본적으로 설치돼 있어 1·2인용 소파나 카페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커피 테이블, 침대 정도만 구입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봄 최대 성수기 가구 소비 급감

골목 곳곳엔 임대 현수막- 같은 날 동래구 사직동 가구거리에 붙은 임대 안내문.

예식과 이사 철이 몰린 봄가을은 가구 업체들의 성수기다. 하지만 이러한 특수도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장기화된 소비 침체에 주거 공간을 합리적으로 꾸미려는 이들이 늘면서 가구 소비 자체가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장롱 침대 등 대형 가구를 주로 취급하는 가구거리에 직격탄이 됐다. 동구 좌천동 가구거리의 한 대형 가구업체 상인은 "120만~130만 원대의 침대나 소파 위주로 팔린다"고 말했다. 그 대신 침구, 커피 테이블, 조명 등 소형 인테리어 용품의 수요는 늘었다. 좌천동의 인테리어 전문 브랜드 업체 관계자는 "침구나 커튼으로 집안 분위기를 바꾸려고 하는 고객들이 생활용품을 많이 찾는다. 조명이나 그릇 세트도 인기"라고 말했다.

고가 가구 소비가 줄다 보니 매출도 '수직 하락'했다. 좌천동 가구거리 업체 10곳에 올해 3월까지의 매출을 문의한 결과, 7곳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답했다. 업체 대부분은 경비 절감을 위해 2, 3명 고용하던 직원을 모두 줄이고, 주인이 직접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좌천동 가구상가상인회 최계현 전 회장은 "가구 업종은 납품과 배송이 중요하므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들 인력을 모두 줄였다는 것은 그만큼 장사가 안된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최 전 회장은 "인터넷을 통해 가격이 공개돼있다 보니 업체 간 경쟁적으로 마진율을 떨어뜨리는 것도 가구 시장 침체의 이유"라고 말했다.

■'패스트 리빙'으로 트렌드 변화

떠난 자리엔 커피점- 불과 두 달 전 가구점이었던 한 점포는 커피전문점으로 업종 전환했다.

가구에 대한 인식 변화도 침체의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과거에는 고급 가구를 오래 쓰고 자녀에게 물려주는 전통이 있었다면, 요즘은 저가 가구를 짧게 쓰고 버리는 '패스트(fast) 리빙'으로 트렌드가 옮겨갔다.

과거 좌천동 가구거리는 자개골목이 형성되는 등 나전칠기로 인기를 끌었지만 급감하는 수요를 극복하지 못했다. 1990년대 25곳에 이르던 칠기 가구점은 현재 단 한 곳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가구거리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좌천동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가구 업체가 몰려 있는 명륜동 가구거리도 35곳 중 2곳만 고전 가구 업체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혼수·사무용 가구 업체다.

저가 가구를 선호하는 경향은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뚜렷해졌다. 합리적인 가격에 실용성이 뛰어난 가구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면서, 장인이 만든 수제가구나 최고급 원자재의 가구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저렴한 비용으로 유행과 계절에 따라 가구, 침구 등 리빙 아이템을 바꾸는 '패스트 리빙' 제품이 각광을 받으면서 가구 소비 트렌드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케아 자라홈 등이 대표적인 패스트 리빙 브랜드다.

저가 가구는 특히 온라인 쇼핑이 보편화되면서 확산하기 시작했다. 동래구 명륜동 가구상인협회 이환 회장은 "손님 대부분이 가격만 묻고 발길을 돌린다"며 "매장에서는 물건만 보고 모델명을 알아가 인터넷에서 구입하는 소비자가 많다"고 말했다. 또 최근에는 가까운 대형마트나 해외 직접구매 등 더 저렴한 상품을 찾아 소비자들이 발길을 옮기면서 가구 '로드숍'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30곳이 넘었던 동래구 사직동 가구거리의 A 가구 업주는 "불과 한 달 새 2곳이 문을 닫았다. 젊은 층이 대형가구점을 찾지 않다 보니 커피전문점이나 애견숍, 이동통신 대리점 등으로 전환하려는 가구점이 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가구점, 쇠퇴 자초 측면도

부산 가구거리가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게 된 데는 일부 가구 업체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릴 당시 고가 가구를 판매하면서 품질과 가격에 대한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20년 전 가구거리에서 혼수용 가구를 구입한 최모(여·48) 씨는 유명 브랜드 가구점에서 장롱과 침대를 구입했지만 알고 보니 중국 업체가 제조한 '짝퉁' 사제품이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최 씨는 "10만 원, 20만 원도 아니고 200만 원이 넘는 가격을 지불하고 가구를 구입했는데 너무 억울했다"며 "이후 '가구거리 제품은 못 믿는다'는 불신이 생겼다"고 털어놨다. 최 씨는 몇 차례 가구를 살 기회가 있었지만 가구점이 아닌 대형마트를 찾았다. 실제로 최 씨 같은 경험을 한 소비자를 주변에서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이 밖에 가구 업체들이 고(高)이윤에 안주해 변화하는 트렌드에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쇠락을 자초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10여 년 전부터 가구거리로 대변되는 가구시장의 침체가 시작됐지만 개별 업주나 상인회 차원에서 협업 등 활로 모색에 소홀했다는 것이다.


# "부산 10대 명물…지자체 지원 뒷전"

■ 최계현 좌천상인회 전 회장

부산 동구 좌천동 가구거리는 부산시가 지정한 10대 명물로, 매년 10월마다 '가구대축제'를 개최해왔다. 공방 체험, 최대 50% 할인 판매 등 행사를 마련해 시민의 발길을 모은 바 있다. 하지만 행사는 지난해부터 중단됐다. 3년 전인 2012년부터 동구청의 지원금이 1500만 원에서 900만 원으로 40%가량 줄어들면서 축제 개최가 흐지부지된 것이다.

가구거리는 수십 년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 상권인데도 지자체의 지원 및 정책에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좌천동 가구상가상인회 최계현(사진) 전 회장은 "가구거리도 전통시장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통시장이 서민 경기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지원이 활발한 것과 달리 자영업자들이 형성하고 있는 가구거리 활성화 방안은 뚜렷하게 없다"고 아쉬워했다.

지자체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가구거리 자체적인 자구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 전 회장은 "배송서비스는 인터넷 업체와 비교해도 손색 없을 정도로 강화됐다. 저가부터 고가 가구를 다양하게 볼 수 있고 에누리도 가능한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최 전 회장은 또 "동일한 제품도 과거에는 인터넷에서 사면 확실히 저렴했지만 지금은 거의 비슷하고, 배송이나 애프터서비스까지 비교했을 때 '로드숍'이 이익인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최 전 회장은 "1980년대 전성기는 문만 열면 손님들이 알아서 찾아 왔지만, 이제는 마케팅이 필요하다. 과거 사고방식으로 영업을 해선 안 되고 상인회 차원에서 이벤트를 여는 등 고객이 찾아오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가구점 경영주의 변화와 혁신을 주문했다.

한편 동구청은 침체일로를 겪고 있는 좌천동 가구거리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동구청 경제진흥과 강계수 과장은 "이벤트성보다는 실질적인 지원책을 마련하기 위해 예산을 절감하게 된 것"이라며 "올해는 상인회 임원진이 구성되면 중단된 축제를 다시 추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