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 이분이 “내가 역사를 좀 썼지”라며 재고 나올 때 서양 쪽에서 손 치켜들고 튀어나올 적수가 한 명 있다. 앞엣이가 사마천(司馬遷·기원전 145?~86?), 뒤엣이가 헤로도토스다. 전한(前漢) 사마천 하면 사기(史記), 이오니아 할리카르나소스 출신 헤로도토스 하면 ‘역사(Historiae)’를 떠올리게 된다. 헤로도토스는 평생 이 책 한 권만 쓰고도 오늘날 우리가 통용하는 ‘역사’ 개념을 만들어냈으니 질이 양을 이겼다. 그 전에 ‘역사’는 ‘관찰’이란 좁은 의미로 쓰였다.

고대 바빌론 신부 경매장. 앞줄에 규수들이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바빌론에는 결혼 적령기 아가씨들을 경매에 부쳐 신부로 데려가는 풍습이 한때 존재했다고 한다. 부유층은 우수한 신붓감을 돈을 주고 데려갔다.

모두 9권인 책을 펼쳐보자. 당시 관행대로 권마다 뮤즈(그리스신화 속 문예를 맡은 아홉 여신) 이름을 소제목으로 달았다. 원래 저자는 제목 없는 통글을 썼지만, 알렉산드리아 시대 편집자가 지금처럼 읽기 좋게 나눠 다듬었다. 1권 소제목이 ‘역사’를 관장한 뮤즈 ‘클레이오’, 9권은 ‘칼리오페’(서사시 여신)다. 고대 동방 대제국 페르시아가 서방 그리스를 3차례 정벌(기원전 492, 490, 480~479년)하는 데 실패한 전쟁사가 핵심 소재다. 저자가 그리스인인지라 서방 관점에서 역사를 다뤄, 동방을 보는 시선이 자주 기우뚱거린다는 점, 고려해야 한다.

당시 페르시아는 흑해·지중해·홍해 내 서아시아 지역을 식민지로 뒀다. 기원전 498년 아테네 군대가 페르시아 식민 도시 사르디스를 침입해 약탈하고 주민을 죽였다. 페르시아가 그리스에 복수하겠다며 정벌에 나설 수밖에. 이 책은 기원전 420년께 나왔다. 페-그 3차 전쟁이 끝난 지 70여 년 뒤다. 그때도 페르시아는 여전히 융성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몰라 불안해하는 암운이 사회에 떠돌았다. 이 와중에 ‘역사’를 펴냈으니 적시타였다. 동양인 처지에서 보면, 페-그 전쟁을 페르시아(동방) 시선으로 다룬 고대 역사서가 없어 아쉽다.

크레타·미케네 문명에 흥미나 지식이 없다면 이 고전을 읽을 때 하품이 나올지 모른다. 그리스어 인명은 발음하기도 힘들고, 지금과 다른 지명은 낯설다. 서술 연대도 왔다갔다하고, 온갖 인종과 문물이 복잡하게 등장해 이해하기가 어지럽다. 과장 오류 허언도 보인다. 하지만 역사 자료를 구하기 힘든, 책조차 귀했던 2000년 전이었단 걸 염두에 두자. 1~6권은 ‘글 멀미’가 나는 편이고, 7권부터 3차 전쟁이 펼쳐지면서 독서에 돛이 달린다.

신화시대에서 새어 나오는 아련한 빛이 사실이 기본인 역사에 닿는 지점에 이 고전이 놓였다. 신화를 다루되 일정한 거리를 둔다. 사제가 접신(接神) 운운하면 헤로도토스는 코웃음. ‘역사의 아버지’이니까. 1권 첫머리에 저술 이유가 나온다.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여서 여러 위업, 특히 전쟁이 일어난 이유를 기록해 둬야 한다.” 여담을 위해서(4권)라고도 했다. 지금 들으면 만화 같은, 고대 얘기를 자세히 들려준다. 영락없는 이야기꾼 헤로도토스. 사료가 드물었으니 직접 보고 들으러 신발 끈을 묶고 여행에 나섰다. 그는 본국에서 쫓겨난 망명자 신분. 바빌론(동쪽) 리비아(서쪽) 시에네(남쪽) 흑해(북쪽)까지 다녀왔다. 대단한 여행가였다. 이때 채록한 인종·문화·지리 얘기가 이 책을 저술한 밑천.

기원전 480년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운데 칼을 쥔 용장)와 300 용사가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을 무찌르기 위해 출전을 준비 중이다. 19세기 자크 루이 다비드 작.

1권엔 소아시아 강국으로 페르시아가 국력을 키워나가는 과정이 나타난다. 고대 왕국인 리디아와 메디아, 고대 도시 바빌론, 유목민 집단 마사게타이가 차례로 무릎 꿇었다. 페르시아 키루스 왕은 승자, 리디아 왕들은 패자. 리디아 왕 칸타올레스는 미인 왕비를 자랑질하다 도가 지나쳐 모든 걸 잃었다. 또 다른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는 현자 솔론을 무시하다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키루스에게 잡혀 화형당하기 직전 목숨을 겨우 부지한다.

페르시아와 바빌론 이색 풍속과 지리 얘기가 흥미롭다. 바빌론에서 신부(新婦)를 경매하는 대목이 그렇다.

2권(에우테르페)은 이집트 편에서 저자는 지리학자 같다. 그는 지리가 문화를 결정한다고 생각해 이 부문을 집요하게 캐고 든다. 이 나라 국토·풍습·생활상·역사와 피라미드를 세운 여러 왕에 대해 설명하는 열정이 남다르다. 그 당시 이집트 여자는 선 채로, 남자는 앉아 오줌을 눈다고 했는데 저자 허풍 같다. 그러면서도 그리스와 교류가 많았던 26대 아마시스 왕은 선정을 폈다고 치켜올렸다.

3권(탈레이아)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은 캄비세스 2세와 다레이오스다. 캄비세스 2세는 반미치광이로 이집트를 정벌하는 치적을 쌓고도 7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을 폭정으로 보냈다. 캄비세스 2세는 허벅지 상처가 덧나 죽었는데 왕위를 차지한 인물은 사제, 가짜 왕이었다. 7명 신하가 그를 처치하는데 그들 중 다리우스가 술수를 써 경쟁자를 따돌리고 왕좌를 쥐었다. 다리우스 1세는 사모스를 공략하고, 바빌론을 키루스 2세에 이어 다시 정복한다. 각 왕 처세는 세간 평가에 그대로 스몄다. 저자는 “페르시아인들은 다리우스를 장사꾼, 캄비세스는 폭군, 키루스는 아버지였다고 말한다”고 썼다.

4권(멜포메네)은 페르시아가 스키타이와 고대 리비아를 복속하는 과정을 간략히 보인다. 스키타이 풍습과 하천, 북방 여러 종족은 자세히 다뤘다. 스키타이 관련 서술은 희소한 자료여서 호평받는다. 리비아인 뜸 의술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종족이라고 치켜세웠다.

5권(테릅시코레)에서 다리우스 1세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친다. 등장하는 고대 도시와 인물이 많아 관계도를 그려야 할 정도다. 앙숙지간인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티격태격한다. 저자는 아테네를 편든다. 아테네가 독재 체제에 놓였을 땐 주변 왕국을 압도할 수 없었지만, 자유·평등을 누리게 된 뒤 단연 최강국이 됐다는 분석.

6권(에라토)은 노쇠한 다리우스 1세 편. 그는 에게해·헬레스폰토스 해협 인근 왕국과 도시를 차례로 점령해 나가다 좌절한다. 그리스 본토를 정벌하려는 시도, 즉 기원전 490년 2차 마라톤 전투에서 무너진 게 결정타. 아테네 북동쪽 40여 ㎞ 지점인 마라톤 평원에서 벌어진 이 전투의 전사자는 페르시아군 6400명, 아테네군 192명.

7권(폴림니아)에서 크세르크세스 왕은 직접 그리스 정복에 나선다. 정벌 규모는 가장 컸다. 여기부터는 전쟁 역사서다. 잭 스나이더 감독 영화 ‘300’은 이 ‘테르모필레 전투’를 소재로 했다.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테르모필레 좁은 입구에서 그리스 연합군 4000명과 함께 크세르크세스 대군을 맞아 싸웠다. 최후까지 남은 병력은 테스피아군 700명과 레오니다스군 300명. 이 중 298명이 끝까지 항전하다 죽었다. 페르시아군은 2만 명을 희생하고도 이 길목을 돌파하지 못하자 샛길로 넘어가 승리한다.

8권(우라니아)에서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로 쫓겨간다. 페르시아 대함대는 폭풍우에 찢기고, 아르테미온·살라미스 해전에서 완전히 제해권을 잃었다. 크세르크세스를 대신해 2인자 마르도니오스가 아테네와 화해를 시도하지만, 거절당한다.

9권(칼리오페)에서 남은 30만 페르시아군이 참패해 그리스 정벌은 물거품이 된다. 저자는 페르시아에 한 방 때리며 막을 닫았다. 전리품을 공평히 나누는 그리스 군대와 쫓겨가서도 다른 여자를 탐내는 크세르크세스 왕을 선악으로 대비했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334~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짓밟혔다.

‘역사’를 들춰보면 이런 교훈이 떠오른다. “지나친 번영은 파멸을 부르며, 조상이 범한 죗값은 자손이 치른다.” 새해 벽두 되새길 잠언이다. 이 고전은 내용이 참 다양하다. 감칠맛 나는 과일이 책에 주렁주렁 달려 독자가 따주기를 기다린다.

서평가·세상관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