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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15> ‘시무십여조’ 구상한 학사루

진골 귀족 탐욕에 백성의 삶 도탄 … 치원, 신분제 철폐를 꿈꾸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5-10 19:26:07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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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골품제’로 8개 신분사회
- 주요 관리 진골이 모두 독점
- 왕권 약화되며 나라 위기 맞아
- 서·북쪽선 반란세력까지 할거

- 학사루 올라 고뇌에 빠진 치원
- 인재 등용과 인사 혁신 위해
- 과거제 실시·세제 개혁 등 담은
- ‘시무십여조’ 왕에 상소 다짐

- 왕경서 부성군 태수 부임 명령
- 당과 외교적 교섭 염두한것으로
- 그곳서 시무책 완성 마음 먹어

   
최치원은 함양군청 건너편에 위치한 학사루에서 ‘시무십여조’ 구상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학사루는 그의 관직 ‘한림학사’에서 따왔다. 함양군 제공
■나라의 미래는 학문에 있으니

천령군(옛 함양) 관아에는 객사 동쪽에 제운루, 서쪽에 청상루, 남쪽에 망악루가 있다. 치원은 평소 이곳에 올라 글을 읽고 나라의 일을 생각하며 고을의 학식 있는 이들을 초대했다. 왕경의 국학에 들어갈 신분이나 여건은 아니어도 학문에 뜻을 두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 깊은 이들이었다.

   
유학은 ‘사서(四書)’인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의 ‘오경(五經)’을 경전으로 삼는 당대의 정치사상이었다. 근본은 주공(周公) 단(旦)이 세운 봉건제와 종법제를 기둥으로 한 통치체제였고, 그에 따른 역사와 공자·맹자 등의 사상가들이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풀이한 일종의 해설서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절대 통치자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고, 엄격한 신분제는 인권에 반하는 부분이 적지 않지만 신정(神政)에서 인간의 정치로 전환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는 크다 할 것이다.

“나라의 형세가 점점 위태해지고 있습니다. 군사로 소임을 다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더욱 학문을 닦아 앞날을 준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혼란은 언젠가 끝나지만 어떤 통치자가 들어서더라도 이전보다 더 나은 제도라야 민심을 수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학에 그 길이 있는 겁니까?” 중년의 선비가 물었다. “먼 훗날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습니다. 설령 다른 무엇이 나오더라도 유학의 근본인 ‘인(仁)’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인은 그저 어짊이 아니라 선(善)의 근원이고 행(行)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군주든, 다스리는 관리든, 따르는 백성이든 서로 아끼고 공경하는 인의 마음이면 세상은 순리가 될 겁니다. 효(孝)와 충(忠)이 그에서 비롯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태수님의 학문은 모두가 들어서 아는 바입니다. 당에서의 6년 수학도 짧지만 18세 어린 나이에 빈공과에서 장원급제를 하신 것은 특별한 총명 때문은 아닌지요. 범부인 저로서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아 자꾸 게으르게 됩니다.” 젊은 유생의 말에 치원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특별한 총명이란 없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다만 ‘상투를 천장에 매달고 허벅지를 가시로 찔러가며(현두자고·懸頭刺股)’, ‘벼룻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고 언 베개에 심신이 상하면서도, 외로운 등불에 그림자와 짝하며 만권의 경서와 사서를 읽는 데 삼동(三冬)의 짧은 해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노력했을 뿐입니다.”

■신라 위기의 근원 골품제

   
상림 옆 연꽃밭. 더러운 물에서 청정함을 지키는 연꽃은 그래서 선비정신의 상징으로 불린다.
안해가 부엌일을 돕는 여인들과 함께 차를 내온다. 천령은 물이 많고 빛이 가득해 연이 잘 자라 치원도 대관림을 조성하며 못을 파고 연을 이식했다. 연은 꽃이 크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연밥을 비롯해 연잎, 연근 등은 다양한 먹거리로 백성의 양식이 되고 약이 되기도 한다. 연잎차와 연근차는 그 맛이 부드럽고 깔끔한 데다 심신을 안정시키고 피를 맑게 하니 치원도 천령에 온 뒤 늘 마셔왔다. 곁들여 내온 조미해 말린 연근을 권하며 치원은 덧붙인다.

“연꽃은 탁한 물에서 피지만 그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으로 불가는 물론 뭇사람의 사랑을 받습니다. 백성을 보살피는 관리나 선비라면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태수님께서는 불법에도 정통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요체는 무엇입니까?” 머리 희끗한 이가 물었다. “평등이라 할 수 있겠지요. 다만 그 평등의 해석은 쉽지 않으니 여전히 숙제입니다.”

골품제. 성골과 진골의 두 개 골, 6두품에서 1두품에 이르는 6개 두품의 8개 신분사회가 신라였다. 왕족마저 두 개로 나뉘어져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다가 진덕여왕에서 성골이 소멸하자 태종무열왕 이후 진골로 이어지고 있다. 6개 두품 또한 관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상위 3개 두품뿐이고, 그저 평민인 백성마저 3개 두품으로 나뉘었다. 상위인 6두품은 본래 신라를 구성한 씨족장의 후예나 복속한 나라의 지배층 후손으로 형성되지만 ‘득난(得難)’으로 불릴 만큼 차지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주요 관청의 장(長)이나 군(軍)의 주요 지휘관은 될 수 없었으니 학자나 종교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가 많았다. 원효나 최치원이 그 전형이다.

천년 왕국 신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가장 큰 근원도 골품제였다. 고인 물이 썩는 정도가 아니라 진골 귀족계층의 도를 넘어선 탐욕은 나머지 신분마저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었으니 어찌 나라가 온전하랴.

■천령군서 부성군 태수로 이임하다

   
연잎, 연근 등을 활용한 상품 모음. 연잎차와 연근차는 심신을 안정시키고 피를 맑게 한다.
오늘도 학사루에 올라 고뇌에 빠져있던 치원은 마침내 결심한다. 한 나라의 관리로서, 학문을 하는 선비로서 무너져가는 나라를 그저 지켜보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목숨을 걸고라도 나라를 살리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계책을 마련해 간하는 것이 옳다. 다만 의욕을 잃은 것일 뿐 왕의 총명함과 바른 뜻에는 변함이 없을 테고 자신에 대한 신뢰 또한 여전하시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시무십여조(始務十餘條)’라 이름 짓고, 우선 골품제 철폐와 왕권 강화를 내세우리라. 아무리 귀족의 반발이 거세다 해도 학문을 닦아 뜻을 세운 이들이 목숨을 걸고 왕을 보위한다면 반드시 이룰 수 있으리라. 다음은 골품제를 대신할 전면적인 과거제 실시와 인사 정책의 쇄신이다. 새로운 인재를 널리 발굴하고 연(緣)을 좇는 인사를 쇄신한다면 나라에는 새 기풍이 일어 무능과 부정이 일소될 것이다. 강력한 왕권과 유능한 관료제는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구축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세제를 개혁해 국고를 든든히 하고 지방호족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 지금 서쪽과 북쪽에서 할거하는 반란세력은 어떠한 이유와 명분이건 제압해야 한다. 국론의 분열은 개혁과 쇄신에 가장 큰 걸림돌이며 인재의 결집을 흩트린다. 당연히 군정(軍政)을 개혁해 군사를 강화해야 한다. 화랑정신의 복원이 그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혼란과 쇄락의 책임이 치자(治者)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백성 또한 주체적 의식으로 깨우쳐야 한다. 다만 그들은 고단한 삶에 의식의 발목이 잡혀있으니 유학과 불교의 융합으로 풍속의 교화를 이끌어야 한다….

점점 가슴이 벅차올라 치원은 밤을 잊은 채 고심하는데 왕경에서 부성군(富城郡·지금의 충남 서산시) 태수로 부임하라는 명이 닿는다. 당나라와의 외교적 교섭을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 시무책은 그곳에서 완성하면 될 터, 치원은 짐을 꾸린다.

■치원의 정신 잇는 함양의 선비문화

경상우도의 선비고장 함양에는 남계서원, 청계서원 등 다양한 유교 유적이 있다. 그중 남계서원은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난 일두(一蠧) 정여창(丁汝昌) 선생을 배향한 서원으로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 등과 함께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선생은 1450년 태어나 김굉필 등과 함께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고,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設書)로 훗날 연산군의 스승 중 한 사람이다. 조선 전기 문신을 대표한 선생은 사림파를 일소하려는 무오사화에 연루돼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별세했다. 평소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유학적인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치자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높은 효행으로 칭송을 들었다. 함양군에서는 매년 선생의 학덕과 효행을 기리는 ‘선비문화제’를 열어 최치원 이후 계승돼온 선비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꾀하고 있다. 최치원의 함양 스토리는 그의 유랑 길에 다시 이어진다.

김정현 객원 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취재 지원= ㈜은산해운항공, ㈜DK-LOK, ㈜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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