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이 멀쩡한 얼굴로 텔레비전에 나와 "그 여자와 절대로 성교를 한 일이 없다"고 발표했을 때 힐러리 클린턴이나 모니카 르윈스키나 둘 다 참 불쌍한 여자라 생각했다. 힐러리는 어쩌다가 난봉꾼 남편을 만나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런 굴욕을 당하고, 르윈스키는 그 많고 많은 남자 중에 하필 꼬드긴 남자가 미국대통령이었나 싶었다．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순간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고 자서전에 쓴 힐러리는 지금 가장 유력한 차기 미국대통령 후보로 떠올랐고, 검정드레스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킨 르윈스키는 당당하게 사이버폭력반대 운동가로 입지했다． 너무 잘났고 또 너무 못난 남자 덕분에 산전수전에다 공중전까지 겪은 여자들의 인생역전이다． 하기야 인생역전이 없는 여성지도자는 별로 본 적이 없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동독 출신에다 전공까지 물리학이라 정치권력과는 거리가 먼 부류로 취급되었다．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가 "그 여자애(that girl)"라고 부르던 메르켈은 지금 유럽연합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지도자다． 휘청거리는 그리스, 스페인, 이태리의 미래는 촌스럽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그 여자애'의 손에 달려있다．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입지한 여성으로는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 뉴질랜드의 헬렌 클라크 총리, 아이슬란드의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대통령,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등이 있다. 이들의 삶도 순탄했을 리 만무하다． 남성 영역인 정치세계에서 살아남고 성공하기까지 말 못할 고초를 겪었음이 분명하다． 알고 보면 하는 짓은 여자도 아니라는 둥, 늘씬하고 예뻐서 거기까지 올라갔다는 둥, 여자라서 정신상태가 불안하다는 둥, 남편 사랑을 못 받아서 권력에 목을 맨다는 둥 음해성 소문들을 달고 살았지만 그녀들은 잘 견뎌냈고 지금도 잘 버티고 있다．

남편이 암살당한 뒤 정치가의 길에 나선 사례도 상당히 있다．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이나 인도의 소냐 간디 여사도 배우자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평범한 주부의 삶을 접었다． 현실 정치경험 부족으로 너무 이상적이고 순진하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아내로서 정치가로서 자신만의 족적을 남긴 건 분명하다． 그보다 더 흔한 경우는 암살당한 아버지의 대를 잇는 여성정치가들이다． 스리랑카의 찬드리카 쿠마라퉁 대통령, 방글라데시의 셰이크 하시나 수상, 파키스탄의 베네지아 부토 대통령,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 등은 부친의 대를 이어 정치에 입문했다． 여기엔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도 포함된다．

정치 이야기가 일상적으로 오가는 분위기에서 자란 그녀들은 웬만한 남자보다 정치세계를 속속들이 더 잘 알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여성정치가들의 행태는 남성정치가들과 다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여동생인 코린 루스벨트 로빈슨이 1920년의 기고문에서 여성들의 정계진출을 독려하면서 '새 빗자루가 더 잘 쓸어낸다'고 주장했지만 권력욕에 관해선 남녀 차이가 별로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여걸'로 알려진 분들의 면면을 봐도 그렇다． 김활란 이태영 김옥길 여사 등은 부친이 부재한 중류층 가정에서 자랐고 박현숙 김초란 같은 여성 선각자들은 보수적인 어머니 아래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실천하려 한 분들이다． 김옥선 박순천 임영신 김정례 등은 가부장적 부친들에게서 남존여비 사상을 배웠지만 학창시절 기숙학교 등에서 생활하며 자립심을 키웠다． 결국 여성들의 가정환경과 리더십은 별개라는 얘기다．

한국 여성들의 지위가 세계에서 거의 바닥권이다. 최근 세계경제포럼의 '세계 성(性) 격차 보고서 2015'에 따르면 한국의 성 평등지수는 145개 조사대상국 중 115위였다. 한국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이 인도나 네팔, 라이베리아의 여성들보다 심각하다는 거다. 경제활동 참여 기회와 교육, 건강, 그리고 정치권한 등 4개 분야에서 비교등급을 매긴 성적표인데 그중에서도 정치권한은 최하 수준이었다.

요즘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온통 역사교과서에 집중되어 있다. 최고정책결정권자가 역사논쟁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이기에 정책의 객관성, 형평성이 담보될 수 없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가족사, 여성, 정치권력, 역사논쟁으로 이상하게 엮이고 버무려진 논란을 듣고 있자면 이런 소모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보통 여성들의 정치진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갈치 아지매의 기운이 넘치는 부산 여성들이 먼저 좀 나서보면 어떤가.

히로시마 시립대학 평화연구소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