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 보자, 하고 있었더니 정말 점입가경이다. 일본 아베 정권 말이다. '잃어버린 20년을 되찾자'고, '일본의 영화를 다시 찾자'고 잔뜩 움츠러든 국민을 부추겨 다시 권력을 쥐더니 이제는 가까운 나라의 국민에게도 막 들이댄다. 일본의 미덕인 부끄러움과 미안함은 어디로 다 가버렸나.

패전 70년 이후 일본 현주소를 국제사회에서 각인할 담화에서 '식민지배' '침략' '사과' 등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아베 총리가 밝혔다.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의 정신은 계승하고 반성은 하겠지만 사죄하지는 않겠다는 거다. 마음으로만 미안해하고 말로는 사과하지 않겠다는 건 도대체 무슨 얄궂은 장난질인가.

만일 올해가 일본 패전 70년만 되는 해라면 자기과오라는 생채기를 일부러 건드려 더 아프기 싫은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겠다. 일본 국민도 군국주의 아래서 모진 고생을 했고, 미국을 잘못 건드렸다가 원자폭탄까지 맞았고, 도쿄 공습 등으로 무고한 시민의 대량 살상이 있었다. 지도자를 잘못 만나 고생한 건 식민치하의 한반도나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작한 일본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시아의 무고한 국민에게 큰 고통을 남긴 일본 정부가 과거 잘못에 관해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면 몇 번이라도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것이 상식이 아닌가. 근데 왜 버티다가 이젠 들이밀기까지 하나.

2015년은 일본 패전 70년, 전후 일본 경제 재건에 막대한 공헌을 한 한국전쟁 발발 65년, 그리고 한일수교 50주년이 되는 매우 중요한 해이다. 요상하기 짝이 없는 말장난을 하고 있는 아베 정권의 행태를 이해하려면 일본과 미국의 관계를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의 가해자가 아니라 미국의 피해자라는 입장을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만 얻을 게 많아진다.

지금 일본 사회가 주목하는 주요 이슈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 미국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TPP)협정 교섭, 그리고 중국 주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참가 여부이고 이는 모두 미국과 걸려 있는 사안이다.

지난 4월 말 미국을 국빈 방문한 아베 총리는 미일 방위협력을 위한 지침과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조속한 건설을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약속했다. 미국과 지구 전역에서 발생하는 전쟁에 함께 참가하고 오키나와의 노후한 미군기지 대안으로 새로운 군사시설을 자연환경을 파괴하고서라도 짓겠다는 거였다. 이는 모두 국내에서 격렬한 찬반양론이 진행 중인 사안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인지 일본 대통령인지 헷갈릴 정도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히로시마에서는 원폭투하 70년을 맞아 '핵없는 세상' 천명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오바마 대통령 방문을 청원하는 편지쓰기 운동이 한창이다. 정치인, 시민, 학생 할 것 없이 모두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쓰기에 열심이다. 이에 나가사키시도 같은 내용의 편지쓰기 운동에 동참했다. 반핵운동을 벌이려면 핵무기 생산이 가능한 플루토늄 재생 사이클 방식의 기존 원자력 발전소들의 재가동을 추진 중인 아베 정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옳은 일일 텐데 말이다.

한편 오키나와에서는 바다를 매립해 미군기지를 설립하려는 아베 정권의 움직임에 맞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를 막아달라는 시민운동 차원의 편지쓰기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 또한 태평양 건너 워싱턴이 아니라 일본 수도인 도쿄로 발송되어야 말이 되는 내용이다. 주권국인 일본에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일본 국민은 아베 정권이 자신의 염원보다는 미국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일 거라 믿고 있다. 더군다나 아베 정권보다 미국 정부가 자신들의 권익을 더 민주적으로 보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 먹고 잘살게 해 준다고 해서 찍어준 정권이지만 민주적 신념이나 도덕관념은 희박하다는 것을 일본 유권자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런 현상은 굳이 핵이나 군사기지 건설 등과 같은 안보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과거사 문제까지 미국을 끌어들여 해결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필자는 노무현 정부 시절 주한미국대사관에서 공공외교 분야 일을 했다. 대한민국 주권을 외치던 노무현 정부가 당시 부시 정부와 사이가 매우 좋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했던 건 그런 노무현 정부의 주권국 주장을 내부에선 인정하고 존경하는 분위기까지 있었다는 거다. 눈치 보면서 비위만 맞추어 주면 무슨 짓을 해도 미국이 자기편을 들어 줄 거라는 아베 정권의 생각은 착각이다. 패전 70주년을 맞아 주판 튕기는 손익계산이 전부라는 사고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대승적인 국면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히로시마 시립대학교 평화연구소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