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42> 1970년대 여대생의 로망 윤형주(하)

음악 아닌 사업 택한 윤형주, 예술가 아닌 연예인으로 추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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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6-11-14 18:46:27
  •  |   본지 23면
- 대마초 사건 후 CM송 제작
- 다시 인기얻고 방송 복귀했지만
- 음악 손 떼고 사업가로 변신

- 거장 평가받는 송창식과 달리
- 시대 풍미한 가수로만 기억
- 재능 살려 음악기획 했다면
- 대중문화계 큰 족적 남겼을 것

가수 윤형주는 은퇴 선언을 여러 번 했다. 첫 은퇴 선언은 1969년 12월 트윈폴리오 활동을 접으면서다. 1971년 데뷔 음반을 발표하고 '0시의 다이얼' 진행을 맡으면서 가요계에 복귀한 뒤 다시 학업 부담을 이유로 1972년 10월 24일 두 번째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해 12월 서울 드라마센타에서 연예 생활 6년을 마무리하는 고별 리사이틀을 가졌다.
1974년 이화축전 사회를 맡은 윤형주. 여대생들의 로망 윤형주는 사회자로 인기가 높았다. 김형찬 제공
1973년 윤형주는 의대 본과 3학년을 충실히 보내다 1974년 겨울에 새로운 음반을 발표하여 '미운 사람'이 히트하면서 다시 가요계로 돌아왔다. 하지만 1974년 12월 세 번째 은퇴를 선언하고, 1975년 3월 홍대 미대를 나온 김보경과 결혼식을 올린다. 1975년 3월은 가정을 꾸리고 학업에 더 열중해야 하는 시기였지만, 당시 윤형주가 불렀던 영화 주제가 '어제 내린 비'는 음반 5만 장 판매를 기록하며 히트를 친다. 연예가에선 윤형주를 잡기 위해 경쟁이 벌어져 윤형주는 또다시 학업과 연예생활을 병행하는 처지가 된다. 그 과정에서 결국 윤형주는 의대를 중퇴하게 된다.

이후 1975년 연말을 강타한 연예계 대마초사건에서 이종용, 이장희, 신중현과 더불어 윤형주가 대마초 상습흡연자로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윤형주의 1970년대는 막을 내린다. 대마초 사건에 관련된 다른 음악인이 그 사건 이후 생계에 심각한 지장을 맞았던 반면, 윤형주는 이 상황을 윤형주다운 순발력으로 돌파한다.

1972년 윤형주 고별리사이틀 때 휴가 나온 조영남과 윤여정이 노래 하고 있는 모습.
대마초 관련으로 징계를 받은 가수 김도향과 동업으로 서울오디오라는 회사를 차리고 CM송 제작에 뛰어든다. 여기서도 윤형주의 남다른 기획력이 발휘되었다. 당시 CM송이 제품의 정보 전달에 치중한 반면 윤형주는 제품에 소비자가 원할 만한 이미지를 입혔다. 데뷔작인 음료수 '오란씨'는 소녀의 꿈과 사랑을 묘사하여 히트를 쳤다. 기업체에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광고음악회사를 차린 지 2년 동안 내놓은 CM송이 200여 곡으로 당시 국내 CM송 전체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삽시간에 광고음악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때 만들어진 주옥같은 CM송이 아이차, 삼립호빵, 써니텐, 라라크랙카, 럭키 유니나 샴푸, 현대칼라, 누가바, 맛동산, 농심라면 등이다. 1977, 1978년 윤형주는 동아광고대상을 받는다.

윤형주는 이렇게 1970년대 후반을 무사히 보내고 1980년대에 또 한 번 자신의 시대를 맞이한다. 해금된 이후 1980년 '바보'와 '사랑스런 그대'가 큰 인기를 끌면서 1981년에는 MBC FM의 '한밤의 데이트' 진행을 맡으면서 방송에도 복귀한다.

1967년 송창식과 윤형주는 '세시봉'에서 만나 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같이 음악을 시작했다. 이후 송창식은 아티스트이자 한국 가요계의 거장이 되었고, 윤형주는 가수로서 나름대로 성과는 있었지만 결국 음악으로 인생을 마무리하지 않고 사업가로 변신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송창식과 윤형주가 같은 무대에 서는 때는 '포크빅 3'라는 이름으로 김세환, 윤형주, 송창식이 세시봉의 추억을 무대에 올릴 때이다. 이렇게 한 무대에 서지만, 각자에 대한 팬들과 음악계의 인식과 평가는 다르다. 송창식은 폭넓은 대중성과 음악성을 갖추고 어떤 경지에 도달한 예술가로 인식된다. 김세환과 윤형주는 한때 7080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연예인으로 인식된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송창식은 가진 것 없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고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고 오직 음악만을 위한 인생을 살았다. 윤형주가 트윈폴리오 해체 이후 학업과 은퇴를 번복하며 세월을 보낼 때 송창식은 음악 외에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송창식은 1975년 가수왕을 차지하며 자신의 시대를 맞이했으며 통기타 가수 대부분 대마초사건으로 활동을 정지당했을 때도 유일하게 평소의 건전한 생활 태도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송창식은 1977년 능력 있는 아내를 만나 편하게 안주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때부터 더욱 예술성과 실험성으로 음악을 밀고 나갔다.

이런 송창식에 비해 윤형주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1970년대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모든 것을 갖춘 '엄친아'였고 '금수저'였다. 송창식이 오직 음악적 재능만 뛰어났던 반면 윤형주는 여러 재능으로 사회자, 진행자, 기획자, 사업가로 실력을 발휘했다.

이런 윤형주가 처음부터 의사를 목표로 의대로 진학했다는 것은 인생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다. 활발하고 재기발랄한 사람이 앉아서 오는 환자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인생을 산다는 것이 애초부터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송창식은 자신이 누군가를 잘 알았던 반면 윤형주는 미처 몰랐거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윤형주의 장점은 유연한 사고와 재기발랄함, 대중친화적인 성격과 탁월한 기획력이었다. 그 모든 재능을 기획력으로 모아낼 수 있는 면모를 갖고 있었다. 이 모든 재능을 누구보다 갖춘 사람으로는 현재의 이수만이 떠오른다. 윤형주가 음악 기획으로 인생을 밀고 나갔다면, 한국대중음악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대중음악저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