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주재소 살리고 항일투사 생가는 헐어

- "우리시대 몰역사적 자화상"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가 열렸다. 결과는 일본인 학교의 우승. 일본인 심판의 명백한 편파 판정 이었다. 격분한 동래중학(현 동래고)과 부산제2상업학교(현 개성고) 학생 1000여 명이 거리로 나서 시위를 벌였다. '무엇이 내선일체(內鮮一體)냐' '너희는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학생들은 대회 심판장 노다이 일본 육군 대좌의 관사를 부수었다. 이른바 '노다이 사건'이다.

당시 동래중 5학년이던 이도윤(1923~2013)은 심판장을 폭행한 혐의로 1년여 동안 투옥됐다. 노다이 사건의 주역이었던 셈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이도윤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선생은 기장군(당시 동래군) 태생이고, 생가도 불과 1년 전까지 건재했다. 그러나 선생의 생가는 이제 '자취'만 남아 있다.

3·1운동 95주년을 하루 앞둔 28일 부산 기장군 동부리 '장관청(將官廳) 복원 사업' 현장. 이곳에는 길이 88m, 폭 8m의 진입도로가 나 있다. 장관청은 조선 후기 동남해안을 지키던 군관들의 집무소다. 진입도로 왼쪽에는 자율방범대 사무실로 사용되는 노란색 단층 건물이 자리 잡았다. 원래 일제강점기 주재소(파출소)였다. 이 건물 맞은편에 삼각형의 나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잡초가 무성했고, 쓰레기도 나뒹굴었다. 이도윤 선생의 생가 터다. 일제에 항거한 선생의 생가는 헐렸고, 식민지배의 첨병 역할을 한 주재소는 보존된 것이다.

기장군은 2008년 12월 장관청이 부산시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되자 2009년 9월 복원 사업 계획을 세웠다. 군은 지난해 6월 공사를 시작하기 전 진입도로 공사부터 마무리했다. 도로 부지에는 선생의 생가 120㎡ 중 3분의 2가 편입됐다. 선생이 지난해 2월 타계한 뒤 건물은 다른 이의 소유로 넘어간 터라 부지 수용은 아무런 저항 없이 진행됐다. 군비 16억 원의 사업 예산 중 10억 원이 부지 보상비로 쓰였다.

반면 주재소는 살아남았다. 애초 도로 부지에 편입됐지만 도로 방향이 조금 틀어졌다. 역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선생의 생가가 있던 마을은 권동수, 권철암, 장봉기 등 독립투사의 생가가 모여 있다. 하지만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이 역시 곧 사라질 처지다.

공태도 기장향토문화연구회 명예회장은 "조선시대 관아 건물을 복원하려고 항일운동가의 생가를 없앤 것은 3·1운동 정신조차 망각해가는 우리 시대의 몰역사적 자화상이다. 생가는 항일정신 계승 차원에서 소중한 자산이다. 생가 터라도 후손에게 남겨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장군 관계자는 "진입로 부지에 이도윤 선생 생가가 포함된 사실은 알지 못했다"며 "장관청이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 양성소 역할을 하며, 3·1운동 유인물을 제작한 공간이었기도 한 만큼 생가 터를 보존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