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1998년 1월 은행 '금 모으기' 창구에서 장롱 속에서 꺼내온 금붙이들을 접수하고 있다. 국제신문 자료사진

# 장롱속 유품까지 '금모으기' 금값 10년간 배 이상 치솟아 예물 되살리기 꿈도 못꿔

"주택시장 침체, 고유가로 인한 경기 침체가 우려되고 있다." "…회계장부를 이중으로 작성하는 수법으로 회사 공금을 빼돌린 것으로 보고…."

경기 악화 전망을 비롯해 대기업 총수의 횡령 사건들이 잇따르자 신문을 보고 있던 김진수(65) 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국민들이 어떻게 해서 나라를 구했는데…. 또 이 모양이니. 나라가 망해도 챙겨 먹는 놈들은 따로 있다니까…."

이럴 때마다 김 씨는 1997년 12월 외환 위기 당시를 떠올리며, 불만을 쏟아내곤 한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 씨는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한파 당시 들불처럼 번져 나갔던 '신(新)국채보상운동'이라 불린 '금모으기 운동'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빠듯한 살림이지만 부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던 김 씨. 그는 '나라가 곧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위식에 장롱 속에 있던 결혼 패물을 비롯해 아이들의 돌반지 등 75g(20돈)의 금붙이 전부를 내놓았다.

장롱 속 금붙이를 꺼내 들고 금모으기 운동을 벌이고 있던 시내 한 은행으로 가던 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김 씨의 부인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직접 건네주셨던 금가락지만은 절대 안된다"며 매달렸지만 그는 부인의 간절한 부탁을 뿌리치고, 금붙이 전부를 들고 집을 나섰다. 누가 금을 강제로 모아야 된다고 시킨 것도 아니었고, 금이 모아져 어떻게 쓰여지는지도 알지 못했지만 김 씨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김 씨는 당시 3.75g(1돈)에 5만 원 정도를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 씨는 부인에게 장모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나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며 남긴 금가락지를 가져 나오면서 "나라 살림만 좋아지면 꼭 금가락지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김 씨는 부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살림살이는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넉넉하지 않은 처지에 배나 오른 금값을 생각할 때마다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금가락지 말만 나오면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 김 씨.

김 씨는 "항상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위기의 나라를 국민이 구했다는 생각에 뿌듯할 때가 많다"며 "그런데 최근 불거지고 있는 고위 공직자와 기업인들의 비리 행각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말했다.

김 씨뿐만 아니라 'IMF 한파'를 금모으기로 이기자는 운동에 동참했던 국민이 들고 나온 금붙이 하나하나의 사연은 눈물겹다. 결혼 반지만 빼고 예물을 모두 가지고 나온 신부, 이웃끼리 뜻을 합쳐 아들과 딸의 돌반지나 생일 기념 목걸이 같은 장롱 속 패물을 모아 562g(150여 돈)을 갖고 나오기도 했던 40대 주부 10명…. 또 입고 있는 마고자에서 금단추를 떼어낸 팔순의 할아버지도 있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국민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공감대 속에서 각각의 애환이 담긴 금붙이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결국 서민들이 내놓은 작은 금붙이가 외환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지렛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금모으기 운동이 벌어진 1997년 말부터 1998년 4월까지 국민 모두가 기대했던 금괴들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숨겨진 재산이 드러나면 골치 아파질까봐, 부정적으로 축적한 재산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서인지 금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일부에선 당시 우리나라 화폐가치에 대한 신용도가 낮아지고, 금이 대량으로 시중에 나오면서 금값이 떨어진 기회를 이용, 금을 매입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엄청난 시세 차익을 챙겼다.

결국 외환 위기를 넘기고, 10년이 지난 현재. 국제적으로 현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있는 금값은 지난 10년간의 물가 상승률보다 배 이상 치솟았고, 금붙이를 들고 집을 나와 나라 살리기에 나섰던 서민들의 삶은 아이들의 돌반지나 결혼 반지를 되찾아 주기조차 힘들 정도로 팍팍하기만 하다.


# 돌반지 10만원 훌쩍… '봉투'로 대체

조카의 돌반지를 사기 위해 금은방을 찾은 박진수(34·부산시 해운대구 좌동) 씨는 잠시 망설이다 발길을 돌렸다. 3.75g(한 돈)짜리 돌 반지가 10만 원이 넘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박 씨는 돌반지 대신 현금 5만 원이 든 봉투로 대신하기로 결정했다.

4일 현재 한 돈짜리 돌반지의 소매가격은 10만5000원. 백화점이나 귀금속매장에서 취급하는 돌반지는 이보다 1만 원 비싼 11만5000원선이다. 외환 위기 이전 4만7000~4만8000원에 불과했던 금의 소매가격이 배 이상 오른 것이다.

외환 위기 이후 지난 10년간 금값이 급등하면서 돌반지가 사라지고 있다. IMF 이전만 하더라도 돌잔치때 순금 한 돈짜리 반지를 선물하는 게 관례였지만 지금은 금값이 말그대로 '금값'이 되면서 돌 선물로써 가격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귀금속 판매점들에 따르면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한 돈에 4만 원선에 거래됐던 국내 금 시세는 경기회복과 함께 수요 증가 등으로 매년 가격이 치솟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뉴욕상업거래소에서 거래된 12월 인도분 금값은 지난주보다 7달러 오른 온스당 794달러. 이는 1980년 이후 27년 만에 최고치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부실 여파로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강화된 점이 금값 상승을 자극했다는 분석이다. 여기에다 최근 금이 투자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국내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금값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이에 따라 가격에 부담을 느낀 많은 시민들은 돌반지 대신 유아 의류나 용품, 현금으로 돌 선물을 대신하면서 돌반지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 귀금속 판매점 업주는 "최근 들어 금값에 부담을 느끼는 손님들이 반 돈짜리 돌반지를 찾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며 "최근에는 손님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돌반지를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금모으기 운동…351만여명이 213여t 모아 헐값수출 논란속 달러 확보

"오늘 우리가 전개하고자 하는 금 모으기 운동은 매우 효과적인 나라살리기 운동입니다. 장롱 속의 금을 캐내 국채를 사거나 외채를 갚고 돈도 나라에 빌려주는 일에 시민 종교인 농민 노조원 등 모든 국민이 나서야 합니다. 마치 우리의 선조들이 구한말 금가락지를 꺼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듯 나라를 살리려는 국민의 에너지를 한 데 모아야 합니다."(외채상환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본부 발대식 호소문 중에서)

'신(新)국채보상운동'으로 불린 외환 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은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1997년 12월 24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소비자 단체장들이 앞장서 금 모으기 국민운동을 제안, 시민단체와 대기업 언론 등이 대대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금모으기 운동은 1998년 1월 5일부터 3월 14일까지 69일 동안 전국에서 351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펼쳐졌고 213여 t(미화 21억3982달러)의 금을 모으는 실적을 거뒀다. 이 운동에 국내 전가구의 5분의 1 이상이 참여한 것이다.

금 모으기 운동은 일반 국민들이 금(순금 24K)을 내놓으면 전문가가 금을 감정, 시세에 따라 현장에서 현금으로 곧바로 돌려 주거나 확인서를 내주고 수출 이후 달러를 당시 환율과 국제금 시세로 평가해 뒷날 원화로 돌려받는 방식(위탁판매 방식)으로 진행됐다. 물론 헌납도 가능했다.

들불처럼 번진 금 모으기 1차 운동기간(1998년 1월 5~31일) 동안 수집된 금은 대략 117t에 참가자는 166만여 명. 1인당 71g(19돈)을 내놓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러한 열기에 힘입어 같은 해 2월 5일부터 21일까지 2차 캠페인이 벌어졌고, 4월 30일까지 이어진 금모으기 운동으로 모두 213t의 금이 모아졌다. 모인 금은 해외로 수출됐다. 금을 맡길 경우 당시 한 돈의 시중 시세는 4만 원에 불과했지만 외국에 판 뒤 달러를 원화로 바꿔 받을 경우 5만7000원 정도 받을 수 있었다. 금 시세나 환율이 얼마나 큰 폭으로 달라질지는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1만 원 정도의 차익은 볼 수 있었다. 결국 국민들이 들고 나온 금은 해외로 팔려 나갔고 달러가 국내로 대량 유입되면서 환율이 안정화되고 외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금 모으기 운동의 성과에 대한 평가는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외국에 수출한 금은 대부분 비싸게 외국에서 사오거나 밀수했던 것인데, 헐값에 내다 판 까닭에 국제 금브로커들의 배만 채웠다는 비판도 나왔다. 또 범국민 운동으로 벌어진 금 모으기 운동 과정에서 한 대기업이 자체 이익을 남기거나 일부 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국귀금속판매중앙회 관계자는 "당시 원화 가치가 하락해 국민이 애써 모은 금이 국제 시세의 반도 안되는 가격으로 외국에 팔려나갔다"며 "그 여파로 국내 귀금속 업체가 매일 수십 개씩 문을 닫아 금 모으기 운동의 중단을 촉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외환보유고 현황   금시세 변화 구분 단위 (억 달러)   구분 단위(3.75g)  매년 11월 기준 1997년 204   1997년 4만7000원 1998년 502   1998년 5만2000원 1999년 740   1999년 5만5000원 2000년 961   2000년 3만9600원 2001년 1028   2001년 4만8000원 2002년 1214   2002년 5만0800원 2003년 1553   2003년 5만8500원 2004년 1990   2004년 6만2500원 2005년 2103   2005년 6만5800원 2006년 2342   2006년 7만5500원 2007년 현재 2573   2007년 9만6250원

금 모으기 운동 실적 구분  위탁 (t)  헌납 (t) 합계 (t)  기간 주택은행  136.301  0.1060 136.407  1998년 1월5~31일 2월5~21일 국민은행  19.957  0.0200 19.977  1998년 1월13일~2월24일 외환은행   4.357  0.0052 4.342   중소기업은행  1.999  0.0023 2.001 1998년 1월15일~2월14일 농업협동조합  50.383  0.0480 50.431  1998년 1월12일~4월30일 합계  212.988  0.185  213.173 자료:재정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