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베르트 가곡 울려 퍼진 산길
- '천수누림길' 온갖 야생화 방긋

- 산나물 캐는 촌로 봄 내음 물씬
- 천문대 대형 망원경 산행 묘미

- 정상 서면 대구·포항의 산이 성큼
- 절골마을 방향 경사 가팔라 조심

빛나는 건 별만 있는 게 아니다. 한껏 봄물이 오른 나무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연두색 새순, 가속도가 붙은 듯 봄의 정점을 향해 세차게 흘러내리는 계류, 은하수의 별처럼 비탈과 능선에 지천으로 널린 야생화…. 봄 산에 얼굴을 내민 어느 것 하나 빛나지 않는 게 없다. 지난달 22일 천문대가 있는 경북 영천시 화북면 보현산(1126.4m)에 가서 '빛 축제'를 만끽했다.

경북 영천 보현산 시루봉에서 바라본 정상과 능선. 시루봉에서 천문대 주차장까지 1㎞가량의 '천수누림길' 주변에는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보현산은 특히 야생화의 보고다. '보현산 약초 이야기'에 따르면 보현산에서 볼 수 있는 야생화는 흰 꽃잎 안에 노란색 무늬가 있는 노랑무늬붓꽃, 병꽃나무, 누른종덩굴, 분취 등 모두 523종이다. 환경부가 지정한 멸종위기식물 2급인 매화마름과 망개나무도 자란다. 보현산에서 야생화를 관찰할 수 있는 길은 두 곳인데, 북사면 길과 천문대주차장에서 시루봉까지 1km 구간의 '천수누림길'이다. 두 곳 모두 접근하기 쉬워 야생화를 찍는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보현산의 또 다른 특징은 서식하는 생물이 모습과 색채를 바꾸는 '계절변이'가 고도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산기슭에는 이미 꽃이 피었다 지고 새순이 난 지 오래다. 이젠 연두색에서 녹색으로 나뭇잎의 색깔이 짙어지고 있다. 반면 7부 능선 이상의 나무들은 아직 가지만 앙상했다. 겨우 꽃이 피려고 몽우리가 맺힌 상태였다. 산기슭에는 봄이 무르익었지만, 정상부는 초봄인 셈이다. 이 때문에 등산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을 연상케 한다.

보현산은 낙동정맥의 줄기인 보현지맥의 가운데에 있다. 보현산에서 팔공기맥이 남서쪽으로 분기한다. 팔공기맥은 화산(828m) 팔공산(1192m) 가산(902m) 냉산(692m)으로 이어진다. 산행은 절골마을에서 시작해 정상에 오른 뒤 시루봉(1123.8m)을 거쳐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코스다. 총거리 약 7.5㎞로 3시간30분가량 걸린다.

노랑무늬붓꽃.

산행 출발지에는 천문대가 있는 마을임을 알리는 '별빛 동상'이 세워져 있다. 계곡을 따라 10분쯤 올라가다 금정사를 지나 계곡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든다. 30분가량 외길을 오르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행로를 바꾼다. 그 이후 천문대 아래 사거리까지 40분가량 가파른 자드락길을 오른다. 길섶에는 노랑무늬붓꽃, 연보라색 제비꽃, 노란색 피나물꽃 등 온갖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피나물꽃.

사거리에서는 가운데 길로 나아간다. 500m쯤 가면 천문대다.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갓 피어난 어여쁜 그 향기에 탐나서 정신없이 보네. 장미화야 장미화, 들에 핀 장미화…." 슈베르트 가곡 '들장미'를 연주하는 피리 소리가 천문대에서 흘러나왔다. 천근만근 무거웠던 발에서 힘이 솟아났다. 이제껏 산에서 이런 음악을 듣지 못해서일까. 피리 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보현산에 와서 처음 알았다.

보현산에는 산나물도 많다. 정상 아래에서 산나물을 캐는 60대 여성을 만났다. "이건 어수리, 요건 맨돌뱅이입니다. 삼겹살을 싸서 먹으면 꿀맛이죠." 기자에게 건네는 산나물을 씹으니 약간 쌉싸름하면서 향긋하고 고소한 맛이 나는 게 입맛을 돋우는데 그만일 것 같았다.

제비꽃.

고도가 높은 만큼 정상에 서니 시야가 탁 트였다. 기룡산 운주산 도덕산 자옥산 비학산 내연산 팔공산 등 영천 일대를 비롯해 대구와 포항, 경주에 이르기까지 겹겹이 주름진 산맥이 장쾌하게 펼쳐졌다. 보현산천문대에서는 별 관측 상징물인 원통 모양의 은색 지붕을 새로 만들고 있었다. 이곳은 국내에서 가장 큰 지름 1.8m짜리 반사망원경과 태양플레어 망원경 등을 갖춘 광학 천문 관측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보현산 정상에서 능선을 타고 시루봉까지 갔다가 절골마을로 하산한다. 시루봉에서 1㎞가량 내려가면 삼거리에 이른다. 거기서 절골마을까지의 거리는 약 1.7㎞다. 길은 외줄기이지만 매우 가파르니 조심해야 한다. 등산이 그랬듯 하산 역시 초봄에서 무르익은 봄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하나의 산을 오르내리면서 과거와 현재를 두루 체감하니 '4차원 산행'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주변 가볼만한 곳

- 정자 '태고와' 앞뒤 모습 달라 이채

횡계구곡의 하나인 모고헌.

보현산 산행 출발지인 정각리의 아랫마을 횡계리에는 '횡계구곡(橫溪九曲)'이 있다. 횡계의 절경 9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희가 살았던 중국 무이무곡을 본뜬 산수 즐기기 방식이다. 쌍계, 공암, 태고와(모고헌), 옥간정, 와룡암, 벽만, 신제, 채약동, 고암이 구곡이다. 이 가운데 조선 숙종 때의 성리학자인 지수 정규양(1667~1732)이 지은 정자 태고와가 특히 인상적이다. 문인들이 개축하면서 모고헌으로 개칭했는데, 정면과 측면 각 2칸의 정방형 팔작지붕 건물이다. 앞에서는 중층누각인데, 뒤에선 단층으로 보인다.

한국 기독교 사적 제2호로 지정된 자천교회.

횡계리 아래 자천리에는 1903년 지은 '자천교회(한국 기독교 사적 제2호)'가 있다. 정면 2칸, 측면 4칸의 일자형 목조 단층 한옥이다. 내부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지붕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건물 내부는 줄지어 늘어선 기둥 때문에 공간이 둘로 나누어져 있다. 기둥 사이에는 남자와 여자 예배석을 구분하기 위해 칸막이를 설치했던 흔적(장부구멍)이 있다. 개신교 선교를 시작하던 시기의 상황과 교회건축이 토착화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교통편

- 부산~영천 시외버스 이용 후 보현행버스 정각서 내리세요

부산 금정구 노포동 부산종합버스터미널에서 오전 7시40분에 출발하는 영천행 시외버스를 탄다. 이 차를 타야만 영천 시내버스 운행시간에 맞출 수 있다. 영천까지는 1시간 20분가량 걸린다. 영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린 뒤 오전 9시30분에 떠나는 정각·보현행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가다 정각삼거리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산행 후 귀가할 때는 정각삼거리 정류장에서 오후 2시50분에 출발하는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게 적당하다.

문의=생활레저부 (051)500-5147 이창우 산행대장 010-3563-0254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