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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조선통신사 유감 /권상인

에도막부 힘 업은 대마도, 두모포왜관서 갖은 횡포
조선통신사에 사배 요구, 역관 홍희남이 거절 통쾌
권상인 ㈔부산문화유산연구회 이사장 | 2022.01.26 20:01
임진왜란은 끝났지만 조선과 국교가 단절되면서 대마도경제는 극도로 나빠졌다. 19대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는 궁리 끝에 선조 33년(1600) 4월, 대마도에 억류돼 있던 조선인 포로 300여 명을 조건 없이 쇄환하면서 국교의 재개를 재촉해왔다. 대마도가 정성을 다해 계속적으로 우호를 촉구해와서 드디어 선조 40년(1607) 1월에는 조선에서 포로쇄환사절로 ‘회답사’ 정사 첨지(僉知) 관직을 가진 여우길 등이 일본 에도막부를 방문해 협상이 시작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조·일 간 국교회복의 공로를 인정해 대마도주 요시토시에게 그 보상으로 조선왕조와 에도막부와의 외교적 권한을 모두 넘겨주었다. 지금 부산시 중구청 자리는 조선시대에 두모포라는 포구로 파도가 현재의 지명인 고관까지 밀려드는 지대였다. 이곳에 대마도가 관할하는 왜관을 조성할 수 있는 특별한 혜택도 받게 됐다. 이때부터 대마도는 강력한 에도막부를 등에 업고 조선과의 외교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1615년 요시토시가 대마도의 이즈하라에서 사망한 뒤, 그의 아들 요시나리(義成)가 제20대 대마도주가 되었다.

1년 후, 광해군 8년(1616)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가 여진족의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하더니 20년 후 인조 14년(1636)에 그의 아들인 태종(太宗) 대에 이르러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었다. 청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냈던 명나라를 도모하기 위해 먼저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후원국이었던 명나라의 세력이 서산에 지는 해처럼 쇠퇴해가는 것과 반비례하여 요시나리는 조선을 등치기하는 ‘호가호위’ 외교로 조선을 보다 더 압박하기 시작했다.

대마도는 병자호란의 여파로 국가의 존망이 흔들리고 있는 조선을 협박해 두모포왜관 안에 도자기 굽는 가마를 짓겠다고 동래부사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허락을 받아냈다. 1639년 두모포왜관 안에 도자기 굽는 가마를 만들고 동래부사에게 도자기 만들 백토를 무상으로 지급받아 사발들을 만들어 대마도로 가져갔다. 또한 꿩과 오리사냥의 명수인 조선산 송골매를 매년 수백 마리씩 지급받아 일본에 팔았다. 당시 두모포왜관 안에 송골매 사육장을 설치하고 사냥훈련을 시켜 에도 귀족들에게 뇌물로 바치거나 매도해 자기의 신분을 대명(大名:다이묘)으로 상승시키는 데 주력하여 목적을 달성했다.

실로 두모포왜관은 역대 대마도주가 ‘여우처럼 에도를 등에 업고 호랑이 행세’를 하며 조선왕조를 농락하던 현장이었다. 요시나리는 조선 효종 6년(1655) 3월 2일에는 문위(問慰) 역관 이형남, 박원랑을 대마도까지 불러들여 어처구니없는 요구조건을 내세웠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통신사는 에도의 북쪽 161㎞ 지점의 닛코산(日光山)에 매장된 제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스(德川家光)의 무덤 타이유인(大猷院)과 이 무덤에서 서쪽으로 1㎞쯤 떨어져 있는 제1대 장군 이에야스의 기념관 도죠구(東照宮)에 가서 참배하라’는 대마도주의 주문을 받았다.

이때 중국 정세는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명과 새로 일어난 청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일본이 이 틈을 노리고 다시 남쪽 해안을 범접해오면 실로 조선왕조의 명운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처지가 될 수 있었으므로 요시나리의 이 무례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조선은 일본에 신종(臣從)하는 입장으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효종 6년 조선통신사 정사 조형(趙珩)의 ‘부상일기(扶桑日記)’에 의하면 통신삼사(通信三使)가 일본 에도막부의 3대 장군 이에미스 무덤인 타이유인에서 제사를 지낸 날은 10월 18일로 기록돼 있다. 참담한 것은 제사를 지낼 당시 그 장소에는 일본 측 고위관리 참석자로는 오직 대마도주 비서격인 차왜(差倭)신분의 후지도모나와(藤智繩) 한사람뿐이었다. 조선통신사를 제사 지내게 한 대마도주 요시나리 조차 제사에 불참했고 도모나와는 통신사에게 절을 사배(四拜)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졸지의 상황에서 당상역관 홍희남의 당당한 거절은 참으로 통쾌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도모나와는 조선통신사가 사배를 하는 것은 닛코산에 묻힌 이에미스 장군에게 절을 하는 게 아니고 제사 장소에 걸려있는 조선왕의 어필(御筆)에 대한 예의라고 변명했다. 1655년 4월 29일 효종이 참석한 어전회의 기록을 보면 효종이 전례에 따라 친필로 ‘일광정계(日光淨界) 창효도장(彰孝道場)’ 이라 쓴 것을 에도로 가는 조선통신사들이 제사지낼 때 필요한 제물(祭物) 폐백과 함께 일본으로 가지고 간 사실이 확인된다. 이 어필을 타이유인에서 통신사 일행이 참배할 때 제문(祭文)과 함께 걸었기 때문에 도모나와의 이런 궤변적 변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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