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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트빌리시에서 며칠을 머물며 고리의 스탈린 기념관 등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하루는 현지 여행사 버스를 타고 풍광이 빼어나기로 유명한 카즈베기란 곳으로 갔다. 출발하자 가이드가 각자 자기소개를 하란다. 열 명이 채 안 되는 승객의 국적은 칠레, 중국, 스페인, 독일 등등 다양하기 짝이 없다. 그중 젊은이 하나는 지난 밤 쏟아 부은 술이 깨지 않았는지 이름만 겨우 내뱉고는 그냥 널브러져 잔다. 일정이 끝나고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던 중 가이드가 심심했던지 무슨 노래든지 자기 나라 노래를 일러주면 틀어주겠단다. 물론 인터넷이 되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와 아내의 차례가 되어 그때 유명했던 BTS의 노래 제목을 말하니(물론 나는 제목만 주워들었다!) 20대의 조지아 가이드는 자기 누이동생이 좋아하는 노래라면서 곧 틀어준다. 그런데 내가 BTS라고 말하는 순간 졸고 있던 청년이 벌떡 일어나더니, “한국사람 맞아요?” 하고는 우리 부부 쪽으로 왔다. 한국어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자신은 아일랜드 사람이고 영어를 가르치며 김해·창원·부산 등지에서 5년인가 살았단다. 바쿠의 아가씨만큼 유창하지 않았지만 대화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조지아에서 한국어 대화라니!
트빌리시에 돌아와 와인을 한 병 사려고 흥정을 하는데 주인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이라고 했더니 갑자기 얼굴이 환해진다. 자기 여자친구가 한국 사람이란다. 지금 모스크바에서 유학 중이라고, 보고 싶다고, 표정이 애틋해진다. 조지아 남자의 한국인 여자 친구가 모스크바에서 공부 중이라니, 이상한 세계화구나! 이후 어디를 가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한국어로는 아니지만 호감을 표하고 대화를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담헌(湛軒) 홍대용은 1765년 12월 27일 북경 자금성 앞 번화가에 서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동악묘(東嶽廟) 앞에 이르니, 패루(牌樓)와 색을 입힌 고운 담장, 반듯한 길거리와 건물, 누각 등이 성대했다. 같은 하늘 아래 이런 대세계(大世界)가 있는 줄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조선 사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외국인 중국 북경 땅을 밟고 그 번영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홍대용의 친구인 박지원 역시 1780년 6월 27일 압록강 책문(柵門)을 넘자말자 번성한 도시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는 시기하는 마음을 갖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북경 정양문 앞에서 유리창의 점포가 27만 칸이나 된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사람 홍대용과 박지원에게 중국은 곧 세계였다. 하지만 그 중국이 청(淸) 체제 이후 강희·옹정·건륭을 거치며 번영의 절정에 서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계가 하나로 묶이고 서양의 배가 지구 곳곳을 휘젓고 다닌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싸잡아 말하자면 임진왜란 이후 내리막길을 걷던 조선은 나라 밖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 급기야 20세기에는 식민지가 되었고 민족상잔의 참극까지 겪었다. 참으로 길고긴 위축과 고난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이제 코카서스 산맥 아래에서도 한국어를 듣고 한국어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힘든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이 한국 사람은 이 어려운 시간도 슬기롭게 넘길 것이다. 조금 더 참고, 서로 돕고, 힘내자고 이렇게 뜬금없는 ‘국뽕’ 이야기를 한번 해 본다.
부산대 교수·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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