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의 ‘지방은 식민지다’라는 책이 출간된 때가 2008년이다. ‘대한민국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다. 하나는 서울공화국이고, 나머지는 지방이라는 내부식민지다’. 누구나 추상적으로 느끼고는 있었지만 지방의 위치가 서울의 식민지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규정되자 공감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12년 전 이 책이 가졌던 문제의식에서 현실은 나아진 게 별로 없다. 두 번의 보수정권이 지나가고 진보정권이 들어섰는데도 그렇다. 그나마 보수정권은 눈치라도 봤다. 그러나 진보정권은 이제 그런 조짐조차 없다.

역대 정권에서 지방분권에 가장 과감한 실행력을 보였던 건 노무현 정부다. 정부 부처를 세종시로 옮기고 150개 넘는 공공기관의 본사를 비수도권에 강제 할당한 작업은 과거 어떤 정부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일이다. 그런 참여정부의 후신을 자임한 문재인 정부도 국토 균형발전과 지방분권 약속이 거창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지금, 계승이나 발전은커녕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

대통령 대선 공약이었던 제2국무회의 신설이나 국회 분원 설립은 감감 무소식이다.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안은 20대 국회 문턱을 못 넘었다. 하이라이트는 공공기관 추가 이전이다. 애초에 먼저 말을 꺼낸 건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였다. 선거를 의식한 립서비스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1차 이전의 효과를 알기에 지방은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추가 이전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이전 기업과 이전 지역은 어디인지 알아보느라 지자체마다 난리법석이었다. 확실한 그림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유치 경쟁부터 벌였다. 그러나 이 대표는 자신의 대표 임기 내에는 추진이 안된다고 총선이 끝나자마자 말을 바꿨다. 국토연구원에서 수행 중인 관련 용역에 추가 이전은 검토대상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최근 추가로 드러났다. 지역민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분권은커녕 수도권 집중화를 부추기는 정책은 이 정부 들어 심해졌다. 집권 초기부터 서울 집값을 잡겠다고 수도권 3기 신도시를 밀어붙이더니 서울에 집 지을 공간도 더 확보해줬다. 광역교통망인 GTX선을 허가해 더 많은 사람이 더 편하게 수도권으로 모여들 수 있게 판을 깔았다. 공장 총량이 정해져 있는 수도권에 특별물량을 배정하는 방법으로 경기도 용인에 SK하이닉스가 입주할 수 있도록 한 게 작년이다. 이번에는 해외에 나간 기업을 수도권으로 유치하기 위해 아예 팔을 걷었다.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 실현”을 호언했던 문 대통령도 언젠가부터 이 이슈에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통령이나 여당 대표가 자신들의 지방분권 약속을 지키려면 지금같은 호기가 없다. 177석이라는 압도적인 국회 의석수를 갖고 있는 데다 수도권에서 전멸하다시피한 야당이 수도권 더 불리기를 막는 데 반대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국회나 관료를 탓하며 핑계만 만발한 건 다가오는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수도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 후보 선호도 1위인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다섯번째 국회 입성에 성공한 뒤 처음으로 준비한 법안에 수도권 규제완화책이 담겼다는 보도가 며칠 전 나왔다. 전남지사를 지내 누구보다 지방의 실정을 잘 알 법한 사람조차 이렇다. 그가 특별히 이상한 것도 아니다. 대권 가도가 탄탄하게 열리느냐 여부는 수도권 민심이 관건이라는 건 대선 주자들이 공유한 인식이다. 표의 절반이 몰려있으니 바보가 아니라면 계산은 간단하다.사정이 이런데도 21대 부산 국회의원 당선자 중에서 지방자치법 개정안의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 배정을 희망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분권이 뭔지 모르기도 하거니와 관심도 없을 것이다. 지역 주민은 그들이 배지를 다는데 필요한 존재일 뿐, 일단 당선되고 나면 몸과 마음은 지방을 뜬다.

한국같은 수도권 집중은 세계에 유례가 없다. 중앙집중형 국가로 분류되는 일본조차 수도권 인구가 전체의 35% 수준이다. 영국은 36.4%, 프랑스는 18.5%다. 반면 한국은 인구 50%가 수도권에 몰려있다. 50대 기업은 수도권 본사가 92%나 된다. 신용카드 결제액조차 81%가 서울·경기·인천에서 나온다. 그런 곳에 지방으로부터의 유입 인구 규모는 올 들어 또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한다.

일본 관료 출신 정치가인 마스다 히로야가 ‘지방소멸’이라는 책에서 “지방소멸은 어느 시점부터 단숨에 가시화될 것이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지방에서 대도시권으로 인구가 유출되면 당장은 지방에 재앙이지만 결국 대도시권도 위축되고 나라 전체가 파멸하게 된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우리가 그 길을 가고 있다.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