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현실 같은 꿈을 꿔 본 적이 있나? 만약 그런 꿈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지?” “너희는 사실은 포유류가 아니야.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는 본능적으로 자기가 사는 환경과 조화를 이룰 줄 아는데 너희 인간은 그렇지 않거든.” 인공지능(AI)시대의 암울한 미래를 그린 공상과학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명대사다. 2199년으로 설정된 영화 속 세상은 AI 컴퓨터가 지배한다. 인간은 인공자궁에 갇혀 AI가 주입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이 실재인 줄 알고 살아간다. 어느 날 VR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무엇이 진짜인지 큰 혼란에 휩싸인다. 그리고 자신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근원적인 의문에 직면한다.

무거운 철학적 주제이지만, 영화는 탄탄한 구성과 박진감 넘치는 영상으로 지겹지 않게 풀어낸다. 영화를 통해 ‘이데아(실재)’ ‘시뮬라크르(가상)’ 등 철학 개념들과 플라톤 들뢰즈 보드리야르 등 이런 개념을 만들거나 새롭게 해석한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나비로 변한 꿈을 꾼 뒤 “내가 나비가 된 걸까, 나비가 나로 변한 걸까”라고 했던 장자의 ‘나비꿈’도 빼놓을 수 없다. 1999년 개봉 이후 ‘매트릭스’가 철학 배우기에 좋은 영화로 줄곧 거론되는 건 이처럼 철학 소재가 풍부해서다.

영국의 공상과학 드라마 ‘블랙 미러’도 철학 학습 텍스트로 각광받고 있다.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인류의 변화를 탐색하는 이 드라마는 2011년 첫 제작된 뒤 지금까지 7년간 꾸준히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재미와 철학적 깊이, 과학적 무게 등 3박자를 고루 갖춘 고품격 드라마여서다. 작곡가이자 가수인 윤종신은 이 드라마에서 영감을 받아 작사·작곡을 하기도 했다. 복제된 인간의식은 인권이 있을까, 사망자를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부활시킬 수 있을까…. 예사롭지 않은 철학적 주제들이 이어지는가 하면, 미국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가 개발 중인 의식 전송기술이 다뤄지는 등 과학 수준도 최첨단이다.영국과 미국에선 현재 ‘블랙 미러’에 대한 철학적 분석 활동이 활발하다. 이 드라마만을 대상으로 논문을 공모하는 철학 학술지까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식 콘텐츠 플랫폼 풀인’이 다음 달 4일 처음으로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 모임을 연다. ‘매트릭스’에 이어 또 하나의 철학 대중화 불씨가 될 것 같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