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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이틀 뒤 전해진 소식에 세상은 놀라면서도 단 한 사람을 주목했다. 장의위원회 1번에 호명된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었다. “27살이냐, 29살이냐?” 혼선이 빚어졌지만 한 가지는 일치했다. 그가 후계자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3대 세습의 앞날을 두고 해석이 분분했다. ‘군부 지지가 관건’ ‘당 실세들의 집단 지도체제 가능성’ 등. 그러나 그의 입지는 공고해 보였다. 이름 앞에 붙은 ‘위대한 영도자’ 호칭이 이를 대변했다. 그래서 섣부른 기대도 나타났다. “10대부터 서양문물을 접해 개혁개방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스위스 유학파와 20대 나이가 근거였다.
1989년 12월 3일 지중해 조그만 섬나라 ‘몰타’로 세계의 이목이 모였다.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역사적 담판을 벌인 것. 결과는 ‘몰타선언’으로 구체화됐다. 핵심은 ‘얄타 체제의 청산’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질서를 규정해온 미소 냉전의 종식을 의미했다. 곧바로 동유럽의 공산정권이 붕괴했다. 소련은 개입하지 않았다. 이어 동서독이 통일됐다. 급기야 공산제국 소련도 해체에 들어갔다. 평화의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말 극적 반전이었다. 전임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규정했다. 특히 전략방위구상(SDI)으로 핵미사일 무력화에 나섰다. 소련은 ‘강 대 강’으로 맞섰다. 핵전쟁 참화를 경고한 ‘지구 종말 시계(Doomsday Clock)’는 멸망 시점인 자정을 향해 치달았다. 반전의 물꼬를 튼 사람은 ‘평화 공존’을 들고나온 고르바초프였다. 1986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레이건과의 담판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마침내 부시도 화답했다.
요즘 동남아 도시국가 싱가포르에 쏠리는 관심은 과거 몰타에 버금간다. 다음 달 12일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 기대 덕이다. 벌써 성급한 장밋빛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그 핵심은 한반도 냉전체제 종식이다. 북미가 비핵화와 체제보장을 주고받을 경우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이후 상황전개는 몰타선언 뒤의 세계사적 급류에 맞먹을 만큼 큰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올해 1월 발표된 지구 종말 시계는 밤 11시58분. 냉전의 최정점이었던 1953년과 같은 시간이었다. 그만큼 최악의 위기상황이라는 뜻. 결정적 이유는 북핵 위기다.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한 미국에 맞서 김정은은 핵미사일의 괌 포격을 공언하며 맞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더 큰 핵 단추” 운운하며 대북압박의 고삐를 조였다. 일촉즉발로 치닫던 충돌 우려는 김정은의 극적인 태도 변화로 한고비를 넘겼다. 4월 27일 판문점선언으로 비핵화를 공개 천명했다. 그리고 다음 달 12일 싱가포르에서 트럼프와의 담판이 남았다.
적어도 이제까지의 흐름은 희망적이다. 당장 30여 년 전 미소 냉전 종식과 비슷한 모습이다. 무엇보다 고르바초프와 김정은이 묘하게 닮은꼴이다. 물론 아직 낙관은 금물이다. 김정은이 고르바초프를 ‘롤모델’로 삼기에는 결정적 하자가 있기 때문. 소련 해체 이후 고르바초프는 절대 권력에서 쫓겨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백두혈통’으로 권좌를 물려받은 김정은으로선 결코 떠올릴 수 없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르바초프식 선제적 평화공세는 김정은으로선 불가피한 승부수라는 점이다. 옛 소련보다 경제체제가 더 망가진 북한으로선 계속된 대결정책은 자멸만 재촉할 뿐이다. 이 사실을 김정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체제보장 후 권력 보장 여부. 이는 김정은 하기에 달렸다. ‘전문가 CEO’격이었던 고르바초프는 지배구조가 바뀌자 끈 떨어진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김정은은 ‘소유 경영인’격. 그가 앞장서 지배체제 개혁을 일궈낸다면 전문경영인을 두고 지분행사만으로도 너끈히 생존할 수 있다. 이후 그의 선택이 주목되는 이유다.
부산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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