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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부산 지역번호가 찍힌 휴대전화를 받았다. 외국인이다. 주저하는 사이 호텔 직원이 프랑스인 할머니와 중년의 딸이 나를 찾는다고 휴대전화 너머로 알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주인공의 이름을 묻고 또 물었다.
바로 2년 전 양란 화분을 건네주고 간 그분은 6·25 참전용사인 고 레이몽 씨의 부인이며 나에게는 또 한 분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레이몽 씨는 3년 전에 작고하셨다. 세상을 뜨면서 의리와 정이 많은 한국 사람과 유엔공원이 있는 부산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고인의 뜻을 따르기가 가족들로서는 녹록지 않았다. 유엔공원은 전쟁 당시 전사자만 안장하므로 최근까지 생존했던 자의 안치는 불허되어 여러 회원국의 동의까지 어렵사리 얻어내야 했다.
그 아버지의 유언을 실천한 아들 롤랭 씨가 인터넷에서 묵을 방을 찾고 있었다. 부친의 1주기 추모 방문을 위해 85세 노모를 모시고 가족과 부산을 방문한다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도 6·25 참전용사로 레이몽 씨와 같은 해 돌아가셨다. 우리 부부는 아무 조건 없이 그 가족을 맞이했다.
추모식 당일 행사가 끝나자 인파가 밀물같이 빠져나갔다. 뒤따르던 롤랭 씨가 발길을 돌리는 게 아닌가. 이국땅의 아버지 묘비 앞에 중년 아들이 두 손을 모으고 차마 발길을 못 떼는 장면을 나는 지울 수 없었다. 이튿날 퇴근길, 내 손에는 장미 한 송이가 쥐어져 있었다. 아들 또래 검은 머리 사내가 들고 온 장미를 받은 백발의 노모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생모가 중풍을 앓다 돌아가신 후 상실감과 충격에 직장을 접고 한의학을 배우러 중국에 간 적이 있다. 어머니를 잃은 그리움은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는다. 프랑스 노파의 포옹에서 포근함이 전해왔다. 나는 창문 너머로 레이몽 씨가 계시는 유엔공원을 가리켰다. 설·생일·성탄절에 우리가 대신 찾아뵙겠다고 하자 앙상한 노모의 푸른 눈이 젖고 있었다. 나는 “한국의 아들 역할을 하겠노라” 했다.
지난해 초 우리 부부는 런던의 딸을 보러 가게 되었다. 소식을 들은 롤랭 씨가 파리에 들르기를 간청했다. 파리 시내에서 공항으로 오던 날 “부산 식구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며 파리의 어머니는 버스가 출발하는 곳으로 달려오셨다. 건네 받은 편지를 기내에서 꺼냈다. “내 남편 레이몽에게는 프랑스와 코레아, 조국이 두 개다. 이제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한국 땅에서 행복하게 안식하고 있다” 한국어로 번역까지 한 구절을 몇 번이나 읽었다. 그 후도 파리의 노모는 여러 차례 손편지를 보내왔다. 그때마다 남편의 편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당신이 너무 보고 싶다!”는 편지를 묘비 위에 올려놓았다. 레이몽 씨가 유엔공원에 처음으로 안치된 후 근년에 작고한 분의 묘비가 6기로 늘어났다.
이번에는 내가 딸아이로부터 소식을 미처 받기 전에 파리의 어머니가 부산에 먼저 도착했다. 88세의 흔들리는 몸을 둘째 딸의 부축에 의지하면서 남편의 생일에 맞추어 왔다. 6·25가 일어나던 당시 세 살 위인 그 남편은 17세 어린 약혼녀를 두고 평화와 인류애를 위해 참전을 자원하였다. 임무를 마친 후 프랑스로 귀국하여 부부는 65년간 아름답게 살아왔다. 부인은 지금도 약혼반지의 손을 펼쳐 보이곤 한다.
5박을 부산에 머무르면서 날마다 같은 시간에 유엔묘지를 들렸다. 그때마다 묘비를 어루만지며 손수건으로도 눈물을 감추지 못해 중년의 딸이 부여안고 어깨를 쓸어내렸다. 부부의 생이별은 하늘도 운다고 들었지만, 3년의 세월도 파리~부산 먼 길도 부부의 정을 끊지는 못했다. “나도 죽으면 부산의 남편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까지 남길 줄이야. 가족애와 의리에 더해 프랑스 부부의 애끓는 순정 앞에 삼강오륜을 우리만의 전통가치로 알았던 나는 말문을 닫는다.
올해는 레이몽 씨 추모 3주기이다. 죽어서도 한 줌의 재로 남편과 남겠다며 그 부인이 유엔공원 안장을 신청했다. 때마침 오월엔 둘이 하나 되는 부부의 날이 들어 있다. 노모가 건넨 호접란이 약혼 사진 속 신부같이 다소곳이 피어 있다. 오월의 부산이 순애보의 꽃으로 눈부시게 빛난다.
한국자산관리공사 선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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