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집안일에 치인 아내를 위해 작은 서비스를 준비했다.
부산 기장 아홉산 숲길 데이트.
단둘이 오붓한 나들이를 떠났다.
황량한 겨울 숲 금강송의 억센 침엽과 맹종죽의 부드러운 활엽의 조화는 삶의 또 다른 경이로운 모습 아니던가.
나이 들며 새삼 소중해진 존재 아내.
평생 친구인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맞는 호젓한 만년 또한 좋지 아니한가.
지난 설 연휴는 고즈넉하면서도 여유롭게 보냈다. 평창올림픽을 빼고는 별다른 뉴스도 없었다. 설날 당일 조상님에 대한 예의를 치른 다음 느지막이 아내와 나들이를 했고, 그다음날 저녁엔 묵은 친구 두엇과 술타령을 벌였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는 처자식 대동해 고향을 찾는 일도 시나브로 사라져 버렸다. 글쎄, 젊을 때는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게 지겹더니만 이젠 오히려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바람 쐬러 간 곳은 부산 기장의 아홉산 숲길이었다. 아홉 봉우리가 모여 산을 이뤘다는데 우리말 이름이 정겨웠다. 산의 초입부터 맑은 공기가 코안으로 스며들었다. 죽죽 뻗은 맹종죽은 둥치가 두 뼘은 실히 돼 보였고 이리저리 구부러진 금강송도 두 아름이 넘었다. 미끈히 솟은 편백에선 알싸한 향기가 코를 찌르는 것이었다. 나는 열병식을 사열하는 장군처럼 뒷짐을 진 채 대나무와 소나무 숲길을 천천히 거닐었다.
한겨울이어서 그런지 호젓했다. 조악한 시설물을 세워놓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조금은 황량하고 고적한 풍경이었다. 집안일에 치이는 아내를 위한 잠깐의 서비스랍시고 나선 짧은 나들이였지만 숲길을 걷다 보니 내가 더 기분이 좋아졌다.
거북등처럼 갈라진 둥치가 힘차게 꿈틀거리며 하늘을 받치고 선, 추사의 ‘세한도(歲寒圖)’ 속 소나무 같은 금강송 군락지를 지나는데 솔바람이 귓등을 스쳤다. 문득 옛 시 하나가 떠올랐다. ‘나이 드니 그저 조용한 것이 좋아 세상일에 마음 쓰지 않게 되었네. 돌아봐도 별수도 없는지라 고향 산천으로 돌아왔다. 솔바람에 띠를 끄르고 달빛 아래 거문고를 뜯기도 한다. 그대, 산다는 게 무엇이냐고? 어부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의 ‘한거(閑居)’란 시다.
재작년 여름 친구 둘과 일본 여행을 갔을 때였다. 허만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올 것 같은 거대한 흰 상어들이 헤엄치는 오키나와의 한 대형수족관 앞에서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맛있는 걸 먹어도 썩 맛있지 않고 멋진 풍경이나 신기한 것을 봐도 딱히 좋다 싶지 않게 되더구먼.” 직장에서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나이이니 세상사가 다 시들해 보여서 그랬을까. 아니, 그보다는 우리 또래가 시나브로 ‘돌아봐도 별수도 없는’ 나이가 된 지라 ‘그저 세상일에 마음 쓰지 않고 조용한 것이 좋아지게’ 돼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산다는 게 뭐냐고 물어올라치면 빙긋 웃으며 짐짓 딴청부리는 나이가 됐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마따나 멋있거나 신기한 풍광을 봐도 심드렁할 나이가 됐지만, 그래도 숲길이라면 언제 걸어도 좋다. 눈록(嫩綠)빛 여린 잎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봄 숲은 막 태어난 어린아이의 웃음 같아서 좋다. 여름 숲은 강건해서 좋다. 생명의 비린내를 풍기며 철갑처럼 억센 잎들로 무장한 나무들은 장년 사내들처럼 굳세고 무뚝뚝하다. 단풍이 물든 가을 숲은 성장한 여인네를 닮아서 볼수록 가슴이 두근거린다. 국화는 아니라도 길섶의 야생화들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지 않던가.
그렇다면 겨울 숲은 모든 것은 내려놓은 만년의 선비와 같다. 진록의 비만을 털어버리고 제 몸의 잎새를 다 떨구어 스스로 수척해진 마른 나뭇가지를 보면 눈물겨운 바가 있다. ‘세한도’ 속의 토담집이 그 속에 호젓이 숨어 있을 것만 같은 풍경이 아닌가.
올해가 그 유명한 ‘58 개띠’들이 환갑을 맞은 해다. 나는 그들보다는 두어 살 나이가 떨어지지만 동시대를 함께 헤쳐 온 또래 세대에 속한다. 우리는 전후의 ‘베이비 붐’을 타고 그 생명이 참깨 씨처럼 우수수 이 땅에 떨어졌던 세대가 아니었던가. 주둥이를 한껏 벌리고 짹짹거리는 새끼에게 모이를 물어다 먹이는 흥부네 제비처럼, 줄줄이 낳은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느라 고달팠던 부모들 슬하에서 우리는 자랐다. 2부제 수업으로 진행된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유례없는 입시 경쟁에 내몰리기도 했다. 영화 ‘1987’이 보여준 대로 엄혹했던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에 헐벗은 청춘을 보낸 세대이기도 했다. 사회에 진출해선 경쟁 사회에 부대끼며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느라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는데, 이제 기껏 작은 아파트 한 채와 퇴직금 몇 푼 손에 쥐고 은퇴의 길에 들어섰으니 세월이 무상하다.
제주도 유배 중에 ‘세한도’를 그린 추사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보낸 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공자께서는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知松栢後彫)고 하셨다’. 자기가 겪은 사람들의 진가는 역경에 처해본 후에야 알 수 있다는 뜻이겠다. 추사는 ‘세상의 도도한 흐름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 좇는 것’인데 ‘바다 밖의 곤궁하고 초췌한’ 자신을 위해서 귀한 책을 힘써 구해 보내 준 이상적의 정성에 감사하는 마음을 ‘논어’의 한 구절을 빌려 표현한 것.
하고 보면, 사람들이 출세를 하려고, 권력을 쥐려고 버둥거리는 건 외로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서 타인이 스스로 자신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려고 그렇게 악을 쓰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롭지 않으려고 출세와 권력을 위해 버둥거릴수록 더 외로워진다는 역설이 존재하는 건 인간이 바윗덩이를 끝없이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려고 헛수고하는 시시포스의 후예이기 때문일까.
그렇게 보면 모든 것이 시든 헐벗고 황량한 겨울 숲에서 문득 발견하는 금강송의 저 억센 침엽(針葉)과 맹종죽의 부드러운 활엽(闊葉)은 우리네 삶의 또 다른 경이가 아닐는지. 그래서 겨울 햇살에 푸르른 잎새를 닮은, 수십 년 묵어도 변하지 않는 우정은 그래서 더 눈물겨운 것일까. 외로울 때 함께 술을 마시며 실없는 소리를 나눌 묵은 지 같은 친구가 한둘이라도 있다면 그 또한 우리 또래에겐 큰 재산 목록일 터다. 숲길 응달에서 아직은 팝콘처럼 딱딱하게 맺힌 매화 봉오리를 보았을 때 나는 해방 직후 북으로 간 화가 김용준(金瑢俊)의 수필 한 토막을 떠올렸다.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디다. 그 수묵 빛깔로 퇴색해 버린 장지 도배에 스며드는 묵흔처럼 어렴풋이 한두 개씩 살아나는 완자창 위로 어쩌면 그렇게도 소담스러운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 실례의 말씀이오나 ‘하도 오래간만에 우리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청하신 선생의 말씀에 서슴지 않고 응한 것도 실은 선생을 대하는 기쁨보다는 댁에 매화가 성개(盛開)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때문이요, 십 리나 되는 비탈길을 얼음 빙판에 코를 찧어 가면서 그 초라한 선생의 서재를 황혼 가까이 찾아갔다는 이유도 댁의 매화를 달과 함께 보려 함이었습니다’.
나이 들면서 새삼 소중해지는 존재는 따지고 보면 또 있다. 함께 늙어가는 아내 역시 소나무, 잣나무처럼 또 다른 ‘평생 친구’가 아닐는지. 그래서 부부를 일러 ‘짝이 되는 동무’란 뜻의 반려(伴侶)라 부르는 것일 게다. 시인 황동규의 시 한 구절이 또 떠올라 나는 피식 웃었다.
‘몇 개의 초가집이 솔가지를 태워/ 그 연기 날개처럼 솟아/ 그대 사는 하늘의 넓이를 재고/ 그 하늘 아래 앉아/ 서로 이를 잡아 주는 그대와 나’(‘아이오와 일기·2’ 중)
어디 호젓한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아내가 청을 했다. 우리는 느릿느릿 숲길을 내려왔다. 서생이거나 일광 어디쯤 어둠이 내려앉는 바닷가 카페에 마주 앉아 조금씩 주름이 잡혀가는 서로의 얼굴을 하염없이 마주 보고 앉아도 좋으리라.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호젓하게 만년을 맞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닐까.
연기 피어오르는 인가가 늘어선 국도변 고압선 위에 한 떼의 까치가 모스 부호처럼 줄지어 앉아 있다. 그 까치 떼, 교신이라도 하듯 문득 공제선을 차고 날아오른다. 하늘에 돈쓰, 돈쓰, 쓰돈, 쓰돈…. 알 수 없는 부호가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나는 그 누구랄 것도 없는 우리 세대의 모든 수신인을 향해 허공에 전보를 띄운다. ‘나, 몸 성히 있음. 그대는 오늘도 안녕하신가’.
전조등을 환히 켠 자동차가 국도를 질주하고 있다. 소설가·경성대 교수
부산 기장 아홉산 숲길 데이트.
단둘이 오붓한 나들이를 떠났다.
황량한 겨울 숲 금강송의 억센 침엽과 맹종죽의 부드러운 활엽의 조화는 삶의 또 다른 경이로운 모습 아니던가.
나이 들며 새삼 소중해진 존재 아내.
평생 친구인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맞는 호젓한 만년 또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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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쐬러 간 곳은 부산 기장의 아홉산 숲길이었다. 아홉 봉우리가 모여 산을 이뤘다는데 우리말 이름이 정겨웠다. 산의 초입부터 맑은 공기가 코안으로 스며들었다. 죽죽 뻗은 맹종죽은 둥치가 두 뼘은 실히 돼 보였고 이리저리 구부러진 금강송도 두 아름이 넘었다. 미끈히 솟은 편백에선 알싸한 향기가 코를 찌르는 것이었다. 나는 열병식을 사열하는 장군처럼 뒷짐을 진 채 대나무와 소나무 숲길을 천천히 거닐었다.
한겨울이어서 그런지 호젓했다. 조악한 시설물을 세워놓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조금은 황량하고 고적한 풍경이었다. 집안일에 치이는 아내를 위한 잠깐의 서비스랍시고 나선 짧은 나들이였지만 숲길을 걷다 보니 내가 더 기분이 좋아졌다.
거북등처럼 갈라진 둥치가 힘차게 꿈틀거리며 하늘을 받치고 선, 추사의 ‘세한도(歲寒圖)’ 속 소나무 같은 금강송 군락지를 지나는데 솔바람이 귓등을 스쳤다. 문득 옛 시 하나가 떠올랐다. ‘나이 드니 그저 조용한 것이 좋아 세상일에 마음 쓰지 않게 되었네. 돌아봐도 별수도 없는지라 고향 산천으로 돌아왔다. 솔바람에 띠를 끄르고 달빛 아래 거문고를 뜯기도 한다. 그대, 산다는 게 무엇이냐고? 어부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의 ‘한거(閑居)’란 시다.
재작년 여름 친구 둘과 일본 여행을 갔을 때였다. 허만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올 것 같은 거대한 흰 상어들이 헤엄치는 오키나와의 한 대형수족관 앞에서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맛있는 걸 먹어도 썩 맛있지 않고 멋진 풍경이나 신기한 것을 봐도 딱히 좋다 싶지 않게 되더구먼.” 직장에서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나이이니 세상사가 다 시들해 보여서 그랬을까. 아니, 그보다는 우리 또래가 시나브로 ‘돌아봐도 별수도 없는’ 나이가 된 지라 ‘그저 세상일에 마음 쓰지 않고 조용한 것이 좋아지게’ 돼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산다는 게 뭐냐고 물어올라치면 빙긋 웃으며 짐짓 딴청부리는 나이가 됐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마따나 멋있거나 신기한 풍광을 봐도 심드렁할 나이가 됐지만, 그래도 숲길이라면 언제 걸어도 좋다. 눈록(嫩綠)빛 여린 잎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봄 숲은 막 태어난 어린아이의 웃음 같아서 좋다. 여름 숲은 강건해서 좋다. 생명의 비린내를 풍기며 철갑처럼 억센 잎들로 무장한 나무들은 장년 사내들처럼 굳세고 무뚝뚝하다. 단풍이 물든 가을 숲은 성장한 여인네를 닮아서 볼수록 가슴이 두근거린다. 국화는 아니라도 길섶의 야생화들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지 않던가.
그렇다면 겨울 숲은 모든 것은 내려놓은 만년의 선비와 같다. 진록의 비만을 털어버리고 제 몸의 잎새를 다 떨구어 스스로 수척해진 마른 나뭇가지를 보면 눈물겨운 바가 있다. ‘세한도’ 속의 토담집이 그 속에 호젓이 숨어 있을 것만 같은 풍경이 아닌가.
올해가 그 유명한 ‘58 개띠’들이 환갑을 맞은 해다. 나는 그들보다는 두어 살 나이가 떨어지지만 동시대를 함께 헤쳐 온 또래 세대에 속한다. 우리는 전후의 ‘베이비 붐’을 타고 그 생명이 참깨 씨처럼 우수수 이 땅에 떨어졌던 세대가 아니었던가. 주둥이를 한껏 벌리고 짹짹거리는 새끼에게 모이를 물어다 먹이는 흥부네 제비처럼, 줄줄이 낳은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느라 고달팠던 부모들 슬하에서 우리는 자랐다. 2부제 수업으로 진행된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유례없는 입시 경쟁에 내몰리기도 했다. 영화 ‘1987’이 보여준 대로 엄혹했던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에 헐벗은 청춘을 보낸 세대이기도 했다. 사회에 진출해선 경쟁 사회에 부대끼며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느라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는데, 이제 기껏 작은 아파트 한 채와 퇴직금 몇 푼 손에 쥐고 은퇴의 길에 들어섰으니 세월이 무상하다.
제주도 유배 중에 ‘세한도’를 그린 추사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보낸 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공자께서는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知松栢後彫)고 하셨다’. 자기가 겪은 사람들의 진가는 역경에 처해본 후에야 알 수 있다는 뜻이겠다. 추사는 ‘세상의 도도한 흐름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 좇는 것’인데 ‘바다 밖의 곤궁하고 초췌한’ 자신을 위해서 귀한 책을 힘써 구해 보내 준 이상적의 정성에 감사하는 마음을 ‘논어’의 한 구절을 빌려 표현한 것.
하고 보면, 사람들이 출세를 하려고, 권력을 쥐려고 버둥거리는 건 외로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서 타인이 스스로 자신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려고 그렇게 악을 쓰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롭지 않으려고 출세와 권력을 위해 버둥거릴수록 더 외로워진다는 역설이 존재하는 건 인간이 바윗덩이를 끝없이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려고 헛수고하는 시시포스의 후예이기 때문일까.
그렇게 보면 모든 것이 시든 헐벗고 황량한 겨울 숲에서 문득 발견하는 금강송의 저 억센 침엽(針葉)과 맹종죽의 부드러운 활엽(闊葉)은 우리네 삶의 또 다른 경이가 아닐는지. 그래서 겨울 햇살에 푸르른 잎새를 닮은, 수십 년 묵어도 변하지 않는 우정은 그래서 더 눈물겨운 것일까. 외로울 때 함께 술을 마시며 실없는 소리를 나눌 묵은 지 같은 친구가 한둘이라도 있다면 그 또한 우리 또래에겐 큰 재산 목록일 터다. 숲길 응달에서 아직은 팝콘처럼 딱딱하게 맺힌 매화 봉오리를 보았을 때 나는 해방 직후 북으로 간 화가 김용준(金瑢俊)의 수필 한 토막을 떠올렸다.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디다. 그 수묵 빛깔로 퇴색해 버린 장지 도배에 스며드는 묵흔처럼 어렴풋이 한두 개씩 살아나는 완자창 위로 어쩌면 그렇게도 소담스러운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 실례의 말씀이오나 ‘하도 오래간만에 우리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청하신 선생의 말씀에 서슴지 않고 응한 것도 실은 선생을 대하는 기쁨보다는 댁에 매화가 성개(盛開)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때문이요, 십 리나 되는 비탈길을 얼음 빙판에 코를 찧어 가면서 그 초라한 선생의 서재를 황혼 가까이 찾아갔다는 이유도 댁의 매화를 달과 함께 보려 함이었습니다’.
나이 들면서 새삼 소중해지는 존재는 따지고 보면 또 있다. 함께 늙어가는 아내 역시 소나무, 잣나무처럼 또 다른 ‘평생 친구’가 아닐는지. 그래서 부부를 일러 ‘짝이 되는 동무’란 뜻의 반려(伴侶)라 부르는 것일 게다. 시인 황동규의 시 한 구절이 또 떠올라 나는 피식 웃었다.
‘몇 개의 초가집이 솔가지를 태워/ 그 연기 날개처럼 솟아/ 그대 사는 하늘의 넓이를 재고/ 그 하늘 아래 앉아/ 서로 이를 잡아 주는 그대와 나’(‘아이오와 일기·2’ 중)
어디 호젓한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아내가 청을 했다. 우리는 느릿느릿 숲길을 내려왔다. 서생이거나 일광 어디쯤 어둠이 내려앉는 바닷가 카페에 마주 앉아 조금씩 주름이 잡혀가는 서로의 얼굴을 하염없이 마주 보고 앉아도 좋으리라.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호젓하게 만년을 맞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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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등을 환히 켠 자동차가 국도를 질주하고 있다.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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