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지른 바위산 아래 난 좁은 길에서 한 선비가 수레를 멈추고 강 건너 단풍나무 숲을 완상하고 있다. 먹색과 암갈색 물감을 엷고 짙게 붓질해 빚어낸 이 산수화에는 가을이 깊다. 조선조의 마지막 화원인 안중식이 그린 ‘풍림정거도(楓林停車圖)’다. 화제(畫題)는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 ‘산행’. ‘멀리 가을 산 위로 돌길이 비껴 있고/흰구름 이는 곳에 인가가 보이네/단풍 숲 저녁경치가 좋아 수레를 멈췄더니/서리 맞은 잎이 봄꽃보다 더 붉네’. 시와 그림은 단풍 숲에서 한 몸을 이뤘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송나라 문인 소식의 시불(詩佛) 왕유 시화에 대한 평론처럼.

단풍 경치는 금강산이 압권이다. 풍광이 얼마나 빼어나면 ‘풍악산(楓嶽山)’이란 가을 이름이 붙었을까. 그 풍경을 묘사한 그림으로는 조선 후기 화가 정수영의 ‘해산첩’이 유명하다. 1797년 가을,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등지를 유람하며 그린 산수화 18점을 묶은 화첩이다.  그 중에서 '금강전도'의 구도가 특이하다. 화면 중앙 밑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을 꼭짓점 삼아 상단 좌우로 1만2000봉을 펼쳐놓은 역삼각형이다. 여름 내내 비바람과 뙤약볕 아래서 수도하다 가을이 되어 번쩍 깨달음을 얻은 듯 암봉들이 피어올린 단풍은 지상에 내려온 은하수를 보는 느낌이다.

금강산을 거쳐 온 단풍이 지난 22일 설악산에 이르렀다. 기상청이 전한 설악산의 첫 단풍 소식이다. 일교차가 큰 데다 일조량이 많아 평년보다 5일 빠르다고 한다. 단풍은 하루 20~25㎞의 속도로 남하한다. 다음 달 10일께면 지리산에서도 첫 단풍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리산의 단풍 명소는 피아골. 조선 중기의 학자 조식은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산도 붉고, 물에 비친 그 풍광도 붉고, 이를 보는 사람 마음도 붉게 물든다 해서 피아골 단풍을 ‘삼홍(三紅)’이라고 한다.단풍이 아름다운 건 비장함 때문이 아닐까. 서쪽 하늘을 불사르는 저녁노을처럼 곧 낙엽이 되어 떨어질 단풍은 지상에 토해내는 마지막 핏빛 절규로 다가온다. 그리고 단풍은 썩어 거름으로 변해 새 생명을 잉태하는 자연의 순환 이치를 몸소 보여주는 묵언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가을은 그래서 만물이 근본으로 돌아감을 일깨우는 성찰의 계절이다. 물러나 지나온 나날을 추스르며 내일을 예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단풍 보듯 자신을 들여다보는 멈춤의 시간 말이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