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대 대학 시절을 그런 마음으로 살았다. 20대 청춘이 세상과의 접점을 찾는 방식이기도 했다. 물리적 폭압에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용기가 부족했고, 현실이라며 무릎 꿇기에는 세상 때가 아직 덜 묻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이런 삶의 자세는 중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다. 청년 시절 척박한 현실에 발을 반쯤만 담그고 살았다는 부채의식을 지닌 채.

대학 졸업 후 백수 2년 차 때인 1991년 5월 중순. 그날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모 지역 방송국에서 면접을 보던 날이었다. 당시 입사 면접의 단골 질문 메뉴가 학생운동 가담 여부였다. 한 적이 없다고 대답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날도 면접관 한 명이 “시위를 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첫 면접도 아니어서 크게 긴장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대답은 보통 때와 달랐다. 다소 충동적이었다. “저는 83학번입니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청년이 돌멩이를 한 번 던져 보지 않았다면 제대로 학교에 다녔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답변이 끝나자마자 그 면접관은 손뼉을 쳤다. “솔직한 대답 정말 고맙다”라는 말과 함께. 순간 당황했다.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 대답 때문인지, 성적이 나빴는지는 이유는 알 수 없다. 면접관의 반응을 봐서는 당락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일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세상은 하고 싶은 말을 하며 사는 게 아니었다. 선택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기득권층이라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을 좋아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적어도 모난 돌이 정 맞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다짐했을 터. 그 다음 면접부터는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자기 나름의 세상과 타협이었다.당시는 시대적인 상황도 그랬다. 1980년대 최루탄 가스로 가득한 대학 캠퍼스는 기존 질서를 거부하면 정의라는 편견을 20대 청년에 심어줬다. 1987년 6월 항쟁은 80년대 학번의 빛나는 성과였다. 대한민국을 바꿨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바뀌었다고 세상을 움직이는 생리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지배하는 힘이 바뀌면 그것이 새로운 권력이었다.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권력 구조의 변경은 곧 새로운 기득권층의 출현을 의미했다. 더욱이 학교 밖의 세상은 정글이었다.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힘의 논리가 지배했다. 기존 질서를 부정하면 제도권 진입 자체가 어려웠다. 소시민이면 세상과의 접점을 찾아가며 좀 비겁하게 살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최근 이명박 정부 때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문을 보면서 26년이나 지난 케케묵은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이유는 생각나는 대학 선배가 있어서다. 당시 몇 번의 면접 때마다 만난 그는 결국 언론사라는 제도권 진입에 실패했다. 그에게는 시위 전력으로 전과가 있었다. 1차 필기시험을 통과하고도 면접에서 계속 떨어진 걸 보면 그는 이력을 알아보는 신원조회를 통과하지 못했던 것 같다. 군사정권이 제도권 진입을 막기 위해 만든 대학생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것이다. 면접 때 시위 가담 여부도 물어보던 시절에 시위 전과까지 있는 운동권 출신이 제도권 언론에 진입하도록 지켜 보고만 있을 사회가 아니었다. 그 후 그를 다시 만난 것은 2년 전쯤이었다. 지금은 장관이 된 부산의 원외 위원장 사무실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동안 그가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다. 운명이라고 자책하며 굴곡진 삶을 살았을 것이란 선입견이 들었기 때문이다. 명함이 두꺼운 직업을 가진 것도, 풍족한 삶을 누리며 산 것도 아닌 것으로 보였다. 아마 학원 강사나 자영업을 하며 20, 30대 꽃다운 젊은 날을 보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참여정부 시절 86세대가 정치적으로 잘나갔을 때 그가 현실 정치에 나섰다는 말을 듣지 못한 것을 미뤄보면 그럴 것 같았다. 이제 그 선배의 전과 기록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삭제되고 민주화운동 유공자라는 훈장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개인이 겪어야 했던 시련을 모두 보상받을 길은 없다. 20, 30대를 고스란히 제도권 밖에서 살아야만 했는데.

물리적인 고통의 강도만 놓고 보면 지금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문은 대졸 취업 준비생에게조차 적용됐던 시절과 비교할 수준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낭비의 측면에서 보면 그 맥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유용하게 활용했을지도 모를 잠재력을 강제적으로 매장해 버렸으니까. 이번 파문을 끝으로 더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

경남취재본부장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