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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없는 고택들…경계 없는 그곳 온기가 마음의 벽 허물다

건축가·인문학자와 함께한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 | 2023.09.06 19:05
- 상지건축 인문학 워크숍서 만난 마을
- 북방식 전통가옥 원형 고스란히 간직
- 매서운 추위 함께 견뎌야 했던 공동체
- 집마다 담·울타리 낮거나 없어 개방적
- 소 키우는 ‘마구간’도 본채에다 마련
- 서로 위하고 생명사랑 새삼 느낀 기행

진짜로 집집이 대문이 없었다. 울도 담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듯해서, 성기거나 낮거나 없었다. 마을 고샅을 걷다 그냥 슥 들어서면 이웃집이고 친척 집이다. 안온했다. 받아들여지는 느낌을 받았고 품어주는 기분을 느꼈다. 강원도 고성군 왕곡(旺谷)마을이었다.
강원도 고성군 왕곡마을의 북방식 전통 가옥 모습이다. 대문이나 담장 자체가 없다. 건물 왼쪽은 본채에서 달아 내어 지은 ‘마구간’으로 부엌의 온기를 소와 함께 나눈다.
■ 독특했던 워크숍

㈜상지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상지건축)는 2024년 창립 50주년을 맞이한다. 부산 자갈치시장 한복판에 본거지를 둔 한국 유수의 건축설계·감리 기업인 상지는 인문·문화·봉사 활동을 널리 펴려는 노력으로 잘 알려졌는데, 내년 50주년을 앞두고 인문·문화 관점의 기념사업을 다채롭게 마련하고 있다. 그 준비 과정의 하나가 지난달 25~27일 펼쳐졌다. ‘2023 공존의 인문학 플랫폼-속초·양양 워크숍’이었다.

왕곡마을의 한옥에서 곡식과 고추를 말리고 있다. 담장이나 대문이 없어 골목 쪽으로 마당이 드러나 있다.
워크숍은 촘촘하고 빡빡하고 대범하게 기획됐다. 부산에서 출발해 2박 3일 동안 강원도 양양·속초·고성을 돌아보고, 토론하는 일정이었다. 상지건축 허동윤 회장, 오철호 총괄사장, 윤택용(상지서울) 사장, 고영란 대외협력본부장, 김태관(상지서울) 운영지원본부장, 홍성필(상지서울) 설계1본부장 등 임직원이 정식으로 결합했다. 여기에 인문학자들이 합류했다. 상지건축이 펴내는 인문 무크지 ‘아크’ 편집위원진도 함께했다.

인문학자로는 서울대 박배균(지리교육과) 교수가 인문학 모임 ‘연구자의 집’ 구성원인 박철현 국민대 중국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이승원 서울대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연구원과 함께 왔다. 성균관대 천정환(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인문학협동조합’ 구성원인 임태훈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안혜연 성균관대 강사, 최은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와 함께 동참했다.

건축가와 인문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이성철 ‘아크’ 편집 고문(창원대 사회학과 교수)을 비롯한 편집진이 합류해 강원도에서 궁리를 거듭한 자리였다.

■“이 마을로 꼭 모시고 싶었다”

왕곡마을 입구에 있는 ‘4세 5효자각’.
천정환 교수는 ‘속초 전문가’ 엄경선 씨를 이번 워크숍의 도슨트(전문 지식이 풍부한 가이드)로 섭외했다. 그는 대학 시절을 빼고는 줄곧 속초에 살며 지역 주간지 ‘설악신문’ 기자로 활동했고, 속초의 인물과 향토사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으며, 실향민과 동해안 납북 어부의 삶을 조명해 왔다. 속초 아바이 마을을 샅샅이 다니며 안내해 준 뒤 그가 일행을 데려간 곳이 고성군 왕곡마을이었다. 그는 “여러분을 이 마을로 정말 모시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 문화의 원형을 여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덧붙였다.

왕곡마을 입구에서 그의 설명을 더 청해 들었다. 아! 그전에 이 마을 입구 ‘동학사적기념비’를 짚어야겠다. 강원도 산골 마을인 왕곡마을에는 19세기 후반 동학 접주가 있었고 포교와 활동이 이뤄졌다. 시대를 앞서간 영성의 지도자이자 사상가로 재조명되는 동학 2세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은 이 마을 김함도의 집에 몇 개월 숨어 지내며 조정의 탄압을 피했다. 1894년 일어난 강원도 동학군 일부는 이 마을 함일순의 집에서 열흘가량 머물며 기운을 추슬렀다. 강원도에는 드문 동학 기념비가 이곳에 1997년 세워진 배경이다.

도슨트가 설명을 이어갔다. “왕곡마을은 14세기께 취락이 형성됐는데요, 19세기께 지어진 북방식 전통 가옥이 군락을 이뤄 원형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북방식 가옥이라는 표현에서 자연의 아름다움 못지않게 선명했을 환경의 척박함을 떠올렸다. 강릉(양근) 함씨 집성촌이라는 뿌리를 공유하는 데다, 추위가 매섭고 오래가며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을 사람과 가축이 함께 견뎌야 했던 공동체가 왕곡마을이다.
“언뜻 보면 평범한 효자 마을(마을 입구에 조선 시대 4대에 걸쳐 5효자가 났음을 기리는 4세 5효자각이 있다)로 보일 텐데, 안으로 가보면 집집이 대문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문이 없다고? 호기심이 솟구쳤다. 우리는 마을로 들어섰다.

■숙박·체험 가능한 국가민속문화재

속초 아바이마을 골목을 걷고 있는 워크숍 일행이 벽을 장식한 가수 민승아의 노래 ‘실향민’ 가사를 보고 있다.
정말로 대문이 없다. 울타리나 담도 낮거나 없다. “겨울에 아주 추우니까 마루는 집안으로 넣었습니다. 남쪽 지역 한옥의 대청마루가 아닙니다. 소를 키우는 ‘마구간’(이쪽 지역에서는 ‘외양간’보다 마굿간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써 왔다고 했다)은 본채와 이어지는 건물을 달아 내어 만듭니다. 본채 부엌의 온기를 소와 나누는 겁니다.” 집은 낮고, 굴뚝은 항아리를 활용해 미감과 안정감을 모두 살렸다. 이것이 바로, 남한에는 드문 북방식 가옥이다.

왕곡마을은 2000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홈페이지(www.wanggok.kr)에서 ‘북방식 백년 전통가옥·전통민속놀이 계승과 체험·전통한옥 숙박체험’ 정보도 얻을 수 있다. 마을을 설명하는 안내인도 별도로 있다. 우리 일행을 맞이한 안내인은 뿌듯한 얼굴로 설명했다. “왕곡마을은 6·25 전쟁도 피해 갔고, 몇 차례 크게 일어난 고성 산불도 피해 갔고, 새마을운동도 피해 갔기에 전통 가옥이 남게 됐죠.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도 여기서 찍었습니다.”

대문 없고, 울과 담은 낮고, 본채에 건물을 덧달아 내 가축과 온기를 나누는 공동체 문화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프라이버시의 절대성과 거창한 아름다움을 높이 사는 현대사회에 이런 생각은 지나친 낭만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건축가와 인문학자가 캐낼 가치는 분명히 보였다. 함께 잘사는 아름다움, 생명을 보듬는 아름다움, 낮고 작은 아름다움, 벽을 낮추고 문을 터 소통하는 아름다움, 해월 최시형 선생과 동학군을 품어준 나눔의 아름다움….

인문학자와 건축가들이 진지하게 구현하려는 가치에는 이렇듯 왕곡마을에서 만난 특유의 아름다움이 포함될 것이다. 이는 우리 문화와 심성의 원형이기도 하다. 마을에는 카페도 있고, 한과와 수정과를 파는 집도 있는데 역시 대문은 없었다. 걷다가 슥 들어가니, 반겨준다.

■아바이마을·유정충 선장

속초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6·25 전쟁 때 급히 내려온 피란민이 만든 아바이마을에서는 애환과 정취를 느꼈다. 벽화로 단장하고 문화공간도 들어선 아바이마을 골목투어는 인상 깊었다. 벽화와 시뿐만 아니라 ‘속초시건조인협회-속초시수산물공동할복장’ 같은 표지판에도 눈길이 갔다. ‘건조인’ ‘할복장’ 같은 표현은 흥미로웠다. 속초 중앙시장은 풍성한 음식과 붐비는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오징어순대와 명태 넣은 함흥냉면은 맛있었다.

속초에서는 지금 난개발 문제가 심각하다고 했다. 바닷가 언덕에 있는 오랜 전통의 동명동 성당에 갔더니, 코앞에 엄청난 빌딩이 올라가 조망을 모두 가릴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속초항 한쪽에 ‘하나호 선장 유정충 상(像)’이 있다. 1990년 3월 1일 제주 해역에서 조업하다 배가 난파하자 선원 21명을 탈출하게 하고, 자신은 끝까지 배에 남아 선원들이 구조될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고 “602 하나호 침몰 중”이라는 무전을 계속 보냈다고 한다. 그는 21명을 살렸다. 자신은 희생됐다. 거룩한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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