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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민의 날’ 기념 임진왜란 역사기행

430년 전 부산항대교 일대 빼곡히 메운 왜군 함선
그 날 이순신에게 100여 척 잃고 도망치기 바빴다
글·사진=김미주 기자 mjkim@kookje.co.kr | 2021.09.29 19:18
- 부산포 사수에 배수진 쳤던 도요토미
- 거북선 앞세운 이순신에 속수무책
- 몰운대·서평포·절영도 등 해전 대패

- 좌천동 ‘정공단’과 다대포 ‘윤공단’
- 수성에 목숨 바친 정발·윤흥신 기려
- 양정엔 동래부사 송상현 업적 새겨

음력 1592년 9월 1일은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에서 일본 수군의 배 100여 척을 격파하고 승전고를 울린 날이다. 당시 부산에 주둔하던 일본 사령관 하시바 히데카츠가 부산포해전에서 패한 뒤 화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으로도 대승이 증명된다. 부산시는 역사적인 승리를 기념하고자 이날을 양력으로 변환한 날짜인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제정(1980년)했다. 그러나 아직 그 의미를 잘 모르는 시민이 많다. 닷새 앞으로 다가온 부산시민의 날을 맞아 430년 전 지역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의 흔적을 좇았다. 다대포성 부산진성 동래성 그리고 대승을 거둔 부산항 일대를 둘러보며 임진년 그날을 복기해본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대승을 거둔 부산포(지금의 북항 일대) 전경. 영도구 청학배수지전망대에서 한눈에 볼 수 있다.
■4월 참혹한 킬링필드 된 부산

임진왜란 첫 전투는 부산진성(1592년 4월 14일 추정)에서 일어났다. 당시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과 관군, 백성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바쳐 일본군에게서 성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세에 정발 장군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기세는 꺾였고 성은 함락됐다. 일본군은 성을 점령한 뒤 그곳에 거주하던 수백 명의 조선인을 모조리 죽였다. 동구 좌천동 ‘정공단’(부산시기념물 제10호)은 정발 장군과 함께 순절한 이들을 추모하는 제단이다. ㈔정공단보존회가 매년 4월 14일 제향을 주관한다.
정공단 입구에 난 계단을 따라 첫 번째 문을 통과하면 1761년(영조 37년) 경상좌수사 박재하가 정발 장군의 공덕을 추모하려고 영가대에 세웠던 충장공 정발 전망비가 나온다. 일제강점기 전차선로를 만들며 영가대가 허물어지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다시 계단을 올라 두 번째 문을 통과하면 정발 장군과 함께 목숨을 바친 사람을 기리는 비석들이 원도심 한가운데 모습을 드러낸다. 정공단은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 부산의 독립정신을 새긴 ‘개항가도’ 코스 중 하나이다. 인근에는 일제강점기 부산 최초로 3·1운동을 시작한 부산진 일신여학교 등 부산 항일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윤공단 입구. 윤흥신 장군과 함께 다대포성전투에서 하루 동안 성을 지켜낸 사람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부산진성이 함락되는 사이 다대포성 첨사 윤흥신 장군은 일본군의 공습에도 하루 동안 성을 지켜냈다. 일각에서 하루를 버텨냈으니 임진왜란의 첫 승리로도 볼 수 있지 않으냐고 말할 정도로 용감했던 수성전이었다. 이튿날 성은 함락됐지만 당시 용맹을 떨친 윤흥신 장군과 일본에 맞서 싸운 이들을 추모하고자 사하구 다대1동 ‘윤공단’(부산시기념물 제9호)이 세워졌다. 윤공단 입구부터 난 계단은 꽤 가파르다. 도시철도 1호선 낫개역에서 15번 버스를 타고 다대푸르지오정류장에서 내리면 윤흥신 장군을 기리는 비석이 있는 계단 맨 위부터 접근할 수 있다. 숲 사이 산책로가 고층 아파트숲으로 연결된다. 계단 중앙에 다대첨사와 관찰사 등의 은덕을 칭송하는 비석군인 선정비가 있다. 윤흥신 장군의 기백은 대대손손 이어져 12대손 윤봉길 의사에 닿는다.

다대포성과 부산진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동래성으로 향했다. 조선 후기 기록화인 동래부순절도를 보면 성벽을 에워싼 일본군 사이 분투하는 조선 관군들, 성 밖으로 도망치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각 군대와 성벽이 낮은 동문을 통해 침입하는 일본군을 볼 수 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서 죽는 건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말을 전하며 일본군과 맞서 싸웠지만, 패배를 직감한 뒤 관복으로 환복한 뒤 죽음을 맞는다. 그래서 양정동 송공삼거리에 우뚝 선 충렬공송상현선생상은 갑옷이 아닌 관복을 입고 있다. 그는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지만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갖췄다고 전해진다.

당시 동래성에는 2만여 명이 거주했고, 백성은 지붕에 올라 일본군에 기왓장을 던지며 결사항전했다. 일본군은 성을 함락한 후 이들도 예외 없이 몰살했다. 당시 조선의 4월은 킬링필드와 다름없이 참혹했다. 압도적인 위엄을 자랑하는 송상현 장군 동상 뒤편에 당시의 혈투 장면과 업적이 새겨졌다.

정공단 내부 정발 장군 등을 기리는 비석. 정발 장군은 임진왜란 첫 전투였던 부산진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했다.
■해상전 무패 이순신 장군, 부산으로

육지전에서 조선이 힘을 쓰지 못할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옥포해전(5월 7일) 당포해전(6월 2일) 한산도대첩(7월 8일) 등 9번의 해상전에서 모두 승리하며 일본군을 공포로 밀어 넣었다. 한산도대첩에서만 왜선 79척을 격파한 조선 수군의 기세에 전쟁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에 부산포 사수 명령을 내렸다. 당시 부산포는 일본군 사령관이 모여 나고야본부와 연락을 취하던 ‘일본 본진’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 본진을 치기 위해 부산포(부산항 북항 일대)로 향했다.

8월 29일 장림포해전을 시작으로 9월 1일 화준구미(몰운대)해전, 다대포해전, 서평포(구평동)해전, 절영도(영도)해전 등 조선 수군은 도망치기 바쁜 왜군 20여 척을 손쉽게 격파하며 부산포의 일본 사령관을 옥죈다. 절영도와 부산 사이 좁은 바닷길인 초량목에서도 4척을 침몰시킨 조선 수군을 맞아 일본은 470여 척의 배로 전선을 구축하고 해안선 진지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일방적 공세에 주춤한 조선은 잠시 후퇴한 뒤 양쪽 바닷길에서 부산포를 향해 일렬(장사진)로 진격했다. 일본은 전위부대인 거북선을 공격하다가도 뒤이어 들어오는 판옥선 등을 막아내기에 바빴고, 그사이 거북선은 왜선 가까이 접근해 배를 수장시켰다. 이 전투로 100여 척의 왜선이 함몰되자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모두 육지로 줄행랑쳤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순신 장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충렬공송상현선생상(부산진구 전포동) 뒤편에 마련된 동판.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전투에서의 활약을 새겨 놓았다.
당시 대승을 거둔 부산포 일대를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곳은 인근에 많지만, 옛 해사고 옆 청학배수지전망대(영도구 청학동)가 특히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 도시철도 1호선 남포역에서 9번 버스를 타고 옛해사고정류장에 내리면 전망대 입구에 내리는데, 버스를 타고 좁은 산복도로를 올라가며 건물 틈새로 보이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게 이곳만의 매력이다.

부산항대교 너머로 조선소 크레인 등이 왜선이 포진했던 자리를 촘촘히 메웠다. 전투를 치르기에는 한없이 작아 보이지만, 오늘날 부산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바다다.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머나먼 바다에서부터 지금의 북항 중심지로 향했을 조선 수군의 위대한 행렬이 잔잔한 수면 위로 겹쳐졌다. 글·사진=김미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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