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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부마항쟁 보고서 3 <4> 10월의 트라우마- 시민 황상윤 씨

시위 구경 중 방화범 몰려 투옥…국가 폭력에 평생 전과자
박호걸 기자 rafael@kookje.co.kr | 2020.11.10 19:48

  
- 퇴근길 시내버스 기다리던 중
- 30m 거리 파출소서 불 치솟자
- 군인들 우르르 몰려와 끌고가

- 억울함 호소에도 경찰은 구타만
- 강압에 허위자백 1년 여 옥살이
- 출소하자마자 삼청교육대 이송

- 계엄 풀리고 열흘만에 나왔지만
- 범죄자 딱지에 긴세월 취업 못해
- 지난해 돼서야 재심서 무죄 받아

지난달 14일 대구 북구의 한 공단 사무실에서 만난 황상윤(67·대구) 씨는 예상 외로 씩씩했다. 41년 전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황 씨는 시위대를 구경하다 부산 남포파출소 방화범으로 몰렸다. 1년 넘게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하는 날, 그는 어머니 앞에서 다시 끌려가 삼청교육대까지 다녀왔다. 기구한 사연이 억울할 법도 한데 그는 인터뷰 내내 활기 찼다. 그러나 1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 말미에는 잊었다던 아픈 기억이 떠오른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퇴근길, 느닷없던 군홧발

황상윤 씨가 지난달 14일 대구 북구 자신의 공장 사무실에서 1979년 10월 16월 퇴근길 자신이 끌려간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황 씨는 남포파출소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1년 넘게 억울한 옥고를 치렀다. 이석교 기자
대구가 고향인 황 씨는 1979년 당시 부산의 한 라이터 공장에서 금형공으로 일했다. 10월 16일 그날도 여느 직장인과 다를 것 없이 퇴근 후 남포동 횟집에서 동료와 소주잔을 기울였다. 자리를 마치고 하숙집이 있는 영도로 가기 위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평소와 다른 풍경이었다. 대로에는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며 오갔고, 버스정류장에서 30m 거리의 남포파출소에는 불길이 치솟았다. 버스는 좀체 오지 않았고, 황 씨와 동료는 정류장에서 시위 현장을 구경했다. 황 씨의 인생이 바뀐 건 바로 그때였다. 웬 군용트럭이 버스정류장에 멈춰서더니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황 씨를 포함한 시민을 트럭에 태웠다.

황 씨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던 동료는 차 밑으로 숨었다 빠져나갔어요.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그대로 서 있다가 당했지. ‘내가 뭘 잘못했냐’고 물어도 소용 없었고, 마구잡이로 때리면서 차에 태우더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게 도착한 부산 중부경찰서에서는 황 씨와 같은 애먼 사람이 적잖이 들어왔다. 이들 대부분은 며칠 있다 빠져나갔지만, 황 씨는 부산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러질 못했다. 황 씨는 “부산 사람은 다 빠져나갔다. 대구 출신인 나와 경남 사람 두 명까지 3명이 마지막까지 남아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나를 남포파출소 방화범으로 엮어 넣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버텼지만, 계속되는 폭행으로 결국 경찰이 불러주는 대로 적었다. 당시 나와 함께 마지막까지 남았던 경남 거제 출신 청년은 경찰의 구타에 못 이겨 ‘저 사람(황 씨)이 시켰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경찰서로 어머니가 찾아왔다. 황 씨는 어머니께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지나가던 한 형사가 이를 듣고 어머니 앞에서 뺨을 세 차례 때렸다. 고압적인 태도에 어머니도 울고, 그도 울었다. 결국 황 씨는 15P 헌병대로 옮겨져 징역 10년을 받았고, 항소 끝에 징역 1년을 받고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다.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기각됐다. 어머니는 빚 100만 원을 내 변호사를 통해 황 씨를 구명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변호사는 50만 원을 돌려주며 일을 접었다.

■출소하자마자 다시 삼청교육대로

구금 기간까지 1년 3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1981년 2월, 드디어 억울한 옥살이를 끝내는 날이었다. 교도소 밖에는 그간 마음고생 하셨을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셨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설레는 마음으로 대전교도소를 나섰다.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온 형제 친척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어머니께 달려갔다. 그런데 느닷없이 경찰이 앞을 막아섰다.

대전경찰서 보안과 형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들은 “황상윤이지? 차에 타”라고 말하며 턱 끝으로 지프 차를 가리켰다. 1년여 전 아찔한 기억이 떠오른 황 씨는 “왜요! 당신들 원하는 데로 살고 나왔잖소. 나를 또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라며 반항했다. 경찰은 “너 집에 못 가. 빨리 타”라고 말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달려와 ‘왜 죗값 다 받은 아이를 다시 끌고 가느냐’고 울부짖었다. 소용없었다.

대전서로 끌려간 황 씨는 이날 다시 군법재판을 받았다. 이번에는 폭력범으로 몰렸다. 황 씨는 억울함에 울부짖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고, 무슨 폭력을 했단 말입니까. 하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워 교도소에 보내더니 이번에는 삼청교육대로 가란 말입니까!” 그러자 검사가 “이것 봐라, 역시 데모한 사람은 다르다”며 혀를 찼다.

국가의 폭압 앞에 개인은 무기력했다. 결국 황 씨는 다음 날 강원도 8공수단으로 옮겨졌다. 삼청교육대 생활은 정말 악몽 같았다. “하루 종일 PT 체조를 받았다. 말 안 듣는 놈은 엄청 때려서 반 죽여놓더라. 서로 잡담할 시간은 없었고, 점호 후 겨우 얘기를 했는데 술 취해 소란을 피웠다고 끌려온 사람도 있고 나처럼 억울하게 끌려온 사람도 많았다. 나가면 ‘자신을 신고한 이장 죽여버리겠다’며 이를 가는 사람도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삼청교육대 생활은 계엄령이 풀리면서 열흘 만에 끝났고, 황 씨는 대구로 내려갔다. 어머니가 놀라서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어머니는 “잘 왔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게 잘 피해 다녀라”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잘 피해 다녀라’라니. 하긴…. 그때는 그 길이 최선이었다.

■“잊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1년여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직장은 잘렸고, 애인은 떠났다. 교도소에 삼청교육대까지 갔다 왔지만 고통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 전과자라는 딱지는 그를 경제적 곤궁으로 내몰았다. 그는 “취업이 안돼 미치겠더라고요. 한참을 놀다가 작은 공장에 어렵게 취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국가 폭력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황 씨는 “젊은 시절에는 그게 안 잊히더라고. 잠도 안 오고, 겨우 잠들어도 자다가 깜짝깜짝 놀라서 깨고…. 그래도 이겨내야지. 잊어야지, 잊어야지, 계속 생각했어요. 안 그러면 미칠 것 같았거든. 잊지 않으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라고 말했다.

황 씨는 잊지 않고 기억하기보다 잊어버리고 살아가기를 선택했다. 좋아하던 운동도 다시 시작했고, 빚을 내 작은 공장도 열었다. 어떻게 잊었냐고 물었다. 황 씨는 “몰라요. 내가 원체 낙천적인 편이기도 하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인터뷰 내내 활기를 잃지 않던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국가를 상대로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살려면 잊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황 씨는 지난해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고, 국가와 보상금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이제 국가가 그에게 배상할 차례다.

대구=박호걸 기자 rafael@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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