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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희가 만난 무대 위의 사람들 <9> 무용수 권봉정

군무도 독무처럼 신들린 듯 추니 ‘수석’돼 있더라는 그녀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2019.05.19 18:46
- 26년째 부산시립무용단원
- 어마어마한 입담으로
- 관객 홀리는 분위기 메이커

- 발등이 곧게 펴지지 않는 결함
- 다리 결점 극복하려는 노력 덕에
- 아름다운 자태와 춤선 갖게 돼

- 현대무용 전공자였던 그를
- 단숨에 전통춤에 빠져들게 한 건
- 기품 넘치는 엄옥자의 원향지무

1993년부터 부산시립무용단에서 활동 중인 베테랑 무용수 권봉정(48)을 만났다. 유쾌한 인터뷰였다. 부산시립무용단의 춤극 ‘마당춤판’과 ‘춤 동화’에서 맛깔스러운 입담으로 관객을 일순에 웃기고 울리는 그녀답다. 미리 짠 것도 아닌데 현장 분위기에 척척 들어맞는 애드리브가 기가 막힌다. “사람들과 눈빛과 호흡을 나누는 것이 정말 재미있어요. 관객이 무대로 들어오고, 제가 객석으로 나가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진행합니다. 박제된 공연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공연이죠.”

■밝고 유쾌한 무용수 수석 꿰차다

무용수 권봉정이 부산시민회관에서 인터뷰 중 춤사위를 선보이고 있다. 전민철 기자
말 잘하기로는 변호사라고 하는데 변호사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을 정도로 흥을 타고났나 보다. 즉흥적으로 쏟아지는 이야기에도 어쩌면 그처럼 재치 있게 응수할까 궁금했다. “글쎄. 제가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런데 저는 좋아하는 책은 반복해서 읽습니다. 삼국지를 열 번 넘게 읽었는데 요즘 또 읽고 있어요. 카페나 음식점에 걸려 있는 짧은 시 구절도 마음에 들면 꼭 기억하려고 해요. 제가 느낀 재미나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으니까요. 그런 것들을 상황에 적절하게 응용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워낙 좋아하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특유의 재치와 유머, 밝고 긍정적인 성격 덕분에 직장에서도 분위기 메이커다.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모인 시립무용단이다 보니 처음에는 주인공이나 좋은 배역을 맡지 못했다. “승진하기 전에는 군무를 췄어요. 군무를 해도 관객이 나만 쳐다볼 거라고 생각하고 진짜 열심히 했어요. 어떤 역할이든지 제 몫을 다하는 게 중요하죠. 그러다 보면 자기의 재주를 발산할 기회도 오고, 자신만의 춤을 출 수 있는 무대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가 평단원에서 수석단원으로 초고속 승급했던 기회는 2002년 예술단 정규 오디션이었다. 대개 전통춤 위주로 오디션 과제가 제시되는데, 그 해에는 아무런 제한 없이 5분짜리 춤을 추라고 했다.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춤을 추었더니 오히려 높은 점수가 나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했던가. 수석이 된 후에는 더욱더 열심히 춤을 췄고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늦은 무용 입문… 노력이 만든 결실

권봉정(왼쪽)과 인터뷰하는 모습.
무용에 입문한 때는 고등학교 시절로, 많이 늦은 시점이었다. 어릴 적부터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가 공무원인 데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에 선뜻 무용을 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다섯 남매라 형편도 넉넉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말, 죽어도 무용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군대에 있던 큰오빠에게 눈물로 쓴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장남의 조언은 효과가 있었다. “변덕이 심해 곧 그만둘 터이니 시켜나 보라”는 큰오빠의 현실적인(?) 설득 덕분에 부모님의 승낙을 받았다. 어렵게 시작했지만 몸은 이미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발을 쭉 뻗어 발등을 다리와 일직선으로 만드는 포인(point)이라는 기본 동작이 있는데 그게 안 됐어요. 처음엔 몸이 굳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포인이 안 되는 신체구조를 타고났더군요. 선생님은 무용을 그만두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재활원도 다니고 고주파 치료도 받으면서 갖은 노력을 했습니다. 장롱 밑에 발을 집어넣어 억지로 펴곤 했죠. 나중에는 무릎과 골반까지 나빠졌어요. 뼈가 부서지도록 애를 써도 남들만큼 다리가 길어 보이지도 않고, 차는 동작도 몇 배 더 힘껏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체를 더 예쁘게 표현하려고 애쓰게 되었죠.”

지난 3월 그는 부산시민회관에서 ‘원향지무(遠香之舞)’(원향은 영남춤의 대가인 엄옥자의 호)를 선보였다. 섬세하게 정제된 기교의 춤사위는 단연 아름답고 우아했다. 춤판의 흥은 간데없고 예인의 기품이 흘러넘친다. 남들보다 더 많은 연습, 다리의 결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남달리 아름다운 자태를 선물한 셈이다. 사실 현대무용 전공자인 그에게 전통춤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원향 선생의 춤은 그를 단숨에 매료시켰다. “엄 선생님 춤은 아름다움 그 자체예요. 흐트러지지 않는 호흡 속에 손가락 끝까지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표현됩니다. 배울수록 어렵고 부족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요.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해서 조금이라도 닮아가고 싶습니다.”

■몸이 허락하는 한 오직 ‘춤꾼’

키가 조금만 더 컸다면 뮤지컬 배우가, 공부를 잘했다면 스포츠 기자가 되었을 것이라 한다.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판소리, 가야금도 배우고 싶다 한다. 실로 예술의 경지라 생각하는 아이돌 스타의 댄스도 배울 계획이란다. 인생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인 남편이 이제는 제발 몸을 돌보라 간곡히 당부할 때 ‘그러마’ 하고 답하면서도 내심 ‘더 열심히 춤춰야지’ 다짐했던 것을 지면에 밝혀도 될까. 어쩌면 무용수는 작품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천생 춤꾼인 그녀는 몸이 허락하는 한 오직 무용수로 남고자 한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오래 무대와 마당춤판을 지키리라 기대한다. 주변까지 덩달아 행복하게 만드는 신명과 갈수록 깊어지는 예인 정신이 그의 힘이다.

공연기획자·인제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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