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언’ ‘모실 시’ 합쳐진 詩
- 돌로 눌러도 튀어나오는 말
- 이것이 詩 아닐까 생각했는데

- 마음속에 꼭꼭 눌러놨던 말
- 동심 일깨우니 주체할 수 없어
- ‘황소+걸음’ ‘코+방귀’처럼
- 천진난만 ‘범벅말’ 만들었다

- 말들이 만나 생동하는
- 새로운 의미 즐거운 분위기
- 팍팍했던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하루치, 하룻밤, 하룻볕, 하룻길,/ 하루저녁, 하루아침, 하루빨리, 하루건너,/ 하루바삐, 하룻강아지, 하루가 새롭다.” 이정록 시인의 시 ‘하루바삐’의 첫 구절이다. 소소한 일상의 하루가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다. 어쩌면 이렇게 예쁜 말들이 있을까. 하루라는 낱말에 또 다른 낱말이 나란히 서면서, 하루의 의미가 넓어지기도 하고 섬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굴까. 우리는 언제부터 이 말을 써왔던 걸까. 팍팍했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즐거워진다. 가락을 붙여 노래처럼 불러보고 싶다. ‘말의 잔치’에 초대받은 기분이다. 이정록 시인이 그 재미나고 풍성한 말을 모아 시집 ‘동심언어사전’을 썼다. ‘시’이면서, 재미난 말이 가득한 ‘단어사전’이기도 하다. 충남 천안시 쌍용동에서 이정록 시인을 만났다.

■詩, 돌로 눌러놔도 마음 깊은 곳에서 튀어나온 말

충남 천안시 쌍용동에서 만난 이정록 시인이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정록은 1964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했다. 그의 시를 좋아하는 수많은 독자는 믿기 힘든 일이겠지만, 그는 중학생 때 딱 한 번 글짓기상을 받았다. 스승의날 기념으로 감사의 글을 써야 하는데 그는 초등학교 때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원망의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읽은 젊은 국어 교사가 이정록의 상처를 알아보았다. “글은 못 썼는데, 초등학교 때 선생님을 대신해서 사과하고 싶으셨나 봐요. 없는 상을 하나 만들어서 주셨죠, 입선이라고.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글짓기로 상을 타게 되었죠.”

그 글이 무척 궁금하다. 정말 못 쓰기야 했을라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었을 게다. 그때 이야기도 재미있다. 이정록은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즐거운 대화를 줄줄 이어간다. 그의 구수한 말 덫에 한 번 걸려들면 헤어나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또 걸려들었다. 뭘 취재하러 왔는지도 잊어버리고 한참을 정신없이 웃었다. 쌍용동의 카페 야외는 추웠지만, 독자들을 위해 포즈를 잡아주는 그의 웃는 얼굴에 주위 공기마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받은 글짓기상 이후에 받은 상이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었다. 다시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며 시인의 길을 걸어왔다. 꾹꾹 눌러왔던 시심의 둑이 터진 것이었을까. 이정록의 시집과 다른 책들의 제목을 다 열거하기 힘들다.

시집 ‘동심언어사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정말’ ‘의자’, 산문집 ‘시인의 서랍’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 동화책 ‘대단한 단추들’ ‘미술왕’ ‘십 원짜리 똥탑’, 동시집 ‘지구의 맛’ ‘저 많이 컸죠’ ‘콧구멍만 바쁘다’, 청소년시집 ‘까짓것’, 그림책 ‘달팽이 학교’ ‘똥방패’를 냈다. 박재삼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김달진문학상,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이정록은 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시(詩)는 ‘말씀 언’ 자와 ‘모실 시’ 자의 합체입니다. 모신다는 의미와 심장에서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진실의 언어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말씀 언’ 자는 ‘마음 심’과 ‘입 구’가 합해진 글자에요. 저 나름대로 이렇게 해석해 봅니다. ‘말씀 언(言)’ 변에는 ‘입 구(口)’ 자가 있잖아요. ‘입 구’ 자는 입 모양을 그려놓은 거고 그 위에 돌 세 개로 눌러놓았네요. 돌로 눌러놨는데도 튀어나오는 말, 이것이 시라는 거죠.”그의 시집에서 감동과 재미를 느꼈던 것은 돌로 눌러놨는데도 마음 깊은 곳에서 튀어나온 말들로 가득했던 덕분이었다.

■동심이 있어야 생겨나는 말

동심언어사전- 이정록·2018·문학동네

‘동심언어사전’은 그의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말 속에 있던 말들이다. 시집을 펼치면 그 말들이 밖으로 튀어나와 통통 뛰어다니는 느낌이다.

‘동심언어사전’은 만해문예학교에서 시작됐다. 홍성은 만해 한용운이 태어난 고장이다. 한용운의 생가가 있는 결성면 성곡리에 생가와 문학체험관이 있다. 만해문예학교에서 동시 쓰는 공부 모임을 하는 첫 시간에 연세 지긋한 분이 이정록 시인에게 “이 나이에 어떻게 시를 써요?”라는 질문을 했다. 우리 마음속 동심을 되살려야 한다며 황소와 걸음이 만난 ‘황소걸음’, 코와 방귀가 만난 ‘콧방귀’를 설명하는 순간, 섬광처럼 ‘동심언어’가 시인에게로 왔다.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동심이 있어야 낱말과 낱말이 만나 ‘겹낱말’ ‘범벅말’이 생겨날 수 있어요. 그렇게 만난 말은 재미있어요. 우리가 살아오면서 적재적소에 늘 사용해왔기에 사회성을 확보하고 있지요. 순간적으로 많은 범벅말이 막 떠오르는데, 등골이 오싹했어요.” 돌로 눌러놨던 말들이 또 한 번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큰일 났다, 왔다, 걸려들었다, 다 찾아보면 엄청 많을 텐데, 이거 쓰다가 죽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안 쓸려고 보름 정도 도망 다녔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떠오르는 겁니다. 결국 잘못했습니다, 쓰겠습니다 하고는 1월 중순경부터 8월까지 270여 편을 썼지요.”

그렇게 태어난 ‘동심언어사전’은 목차만 봐도 재미있다. “아, 그렇구나. 이 말도 겹낱말이구나” 새삼 알게 되기도 한다. 시 ‘밥심’을 읽어보자. “이 할미가/ 아비를 낳을 때/ 얼마나 힘에 부치던지/ 미역국에 밥 한 그릇 뚝딱 말아 먹고/ 몸을 풀었단다./ 굶지 마라./ 먹는 게 제일 큰일이다./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일을 크게 저질러라.”

짧으면서도 밥심의 의미와 그 안에 담긴 우리의 정서까지도 느껴진다. 우리 마음속에, 생활 속에 이렇게 예쁘고 결 고운 말들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고마운 우리말이다.

최근에 나온 시인의 산문집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에서는 시를 읽는 그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이정록 시인이 쓴 산문은 시와는 또 따른 맛이 있다. 산문집에는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어머니 스케치북을 본다’는 제목 아래 시인의 어머니가 그린 예쁜 그림이 실려 있다. 그 그림들을 보는 순간 시인이 말하는 동심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것 같다. 맑고 밝고 환했던 시절에 우리 가슴에 심어졌던 동심, 이정록의 가슴에는 그 동심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