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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히어로 <10> 화재서 이웃 구한 이재군 씨

검은 연기가 동네 덮친 날 … 7분 만에 상황 정리한 개금동 이반장
김채호 기자 | 2020.05.19 20:00

  
- 화마 휩싸인 다세대주택
- 거동 불편한 주민 구하려고
- 맨몸으로 불길 뛰어든 이 씨
- 이웃들과 힘 합쳐 방범창 뜯고
- 연기 속 주민 무사히 구해내

- 혹여나 소방차 진입 못 할까봐
- 오토바이 타고 골목 교통정리
- 119신고부터 도착까지 7분간
- 소방대원도 놀랄만큼 완벽 조치

- “40년 터 잡고 살아온 우리동네
- 어떤 일이든 발 벗고 나설 것”

“여기 건물 안에 사람 있어요!”

부산소방 119 상황실로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다세대주택에 불이 났고 건물 안에 사람이 있다는 신고전화였다. 수화기 너머로 “아저씨 피하세요!”를 외치던 신고자는 돌연 “어…구했어요”라고 당황한 듯 말했다. 소방대가 도착하기 전 화재현장에서 시민을 구해낸 이는 평범한 이웃주민이었다.

국제신문 취재진은 우리 속에서 생활하는 평범한 이웃, 히든히어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던 중 식당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일부 식당이 휴업을 하거나 영업이 어려워진 상황임을 감안해 도움이 되고자 취재진은 히든히어로의 식당에서 밥 한 끼를 먹기로 했다. 다만 기자는 따로 신분을 속이고 밥 구걸을 하기로 했다. 부산온 시즌1의 기획의도와 같이 이웃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손을 내미는 모습을 기대하며….
지난 13일 개금동 히든 히어로 이재군(오른쪽) 씨와 아내 배정희 씨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동영상 캡처
■다시 느낀 밥 한 끼의 온기

지난 13일 부산진구 개금동 히든히어로가 있는 가게에 취재진 중 일부가 들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가게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 기자는 겨우 용기를 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방에서 체격 좋은 60대 남자가 나왔다. 온 몸이 파르르 떨렸다. 기계적으로 외웠던 말을 내뱉었다. “죄송하지만 수중에 돈이 없는데 밥 한 그릇 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사장 이재군(67) 씨는 별일 아니라는 듯 “앉으세요”라고 쿨하게 말한 뒤 주방으로 사라졌다. 민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잠시 후 이 씨는 양철 쟁반에 한 끼를 챙겨 가져왔다. 뚝배기에 아구탕이 담겨있고 밑반찬이 놓였다. 앞서 취재진이 시킨 음식과 다름 없었다. 애써 침착하려고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음식을 보는 순간 기자 눈에 뭔가가 고였다. 안경을 닦는 척하면서 눈가를 슬쩍 닦은 뒤 음식을 내놓은 이 씨를 다시 봤다. 그가 바로 히든히어로의 주인공이다.

따끈한 아구탕 한 그릇을 비우고 “사실은 기자입니다”라고 사정을 밝혔다. 기자의 설명을 들은 이 씨의 부인 배정희(64) 씨는 “배고프다고 하니까 밥을 드렸지”라며 “요즘 코로나로 너무 어려운 시절이 되다 보니 젊은 사람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랬겠나 싶었죠”라고 말했다. 멋쩍은 웃음을 지은 이 씨도 “딴 걸로 달라고 하면 못 주지만 배가 고프다고 하는데 밥은 줘야죠”라며 쑥스러운 듯 말했다.

이 씨는 개금동에서 40년 넘게 산 토박이다. 개금동에서 청년시절을 보냈고 아내를 만났다. 세월이 흘러 손자도 태어나 대가족이 되었다. 이 씨의 가게는 늘 동네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이 되었고,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가 찾아올 때 마다 이웃과 함께 극복하고 이겨냈다. 그에게 개금동은 고향 그 이상의 보금자리였다. 당연한 듯 이 씨는 동네에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서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검은 연기가 동네를 덮친 그날도 이 씨는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나섰다고 회상했다.

지난 2월 부산 부산진구 개금동 다세대주택에 화재가 발생(왼쪽)했다. 소방관들이 불을 끄고 있다. 동영상캡처
■“우리 동네 일이니까”

지난 2월 15일. 개금동에 퍼진 매캐한 연기가 이 씨를 이끌었다. 다세대주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한 청년은 119에 전화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화재현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때 신고자가 전화기를 붙잡고 “여기 안에 사람이 있어요. 빨리 와주세요!”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1층 창문 틈으로 보이는 정 모(64) 씨는 거동이 불편해 스스로 대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이었다. 방 안에서 정 씨의 신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귀중한 목숨이 사라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이 씨는 주저하지 않고 나섰다. 그는 “사람부터 구해야 합니다. 도와주세요!”라고 외쳤다. 동네 주민도 하나 둘 그의 말에 움직였고 힘을 합쳐 방범창살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창살이 뜯겨나갔다. 창문을 열자 내부는 이미 불꽃과 함께 연기가 가득했다. 주민들은 누구도 불꽃과 연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맨몸으로 집 안에 갇혀있던 정 씨를 창문으로 끄집어냈다. 이 씨는 “방안은 앞이 안보일 정도로 연기로 차 있었다”며 “사람부터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딴 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고 생생하게 그날을 기억했다.

소방차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이 씨는 또다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다. 좁은 동네에 소방차가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오토바이를 타고 골목 내 주차정리를 했다. 동네 주민 어느 누구도 협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씨는 “제가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해도 개금동 주민들은 늘 마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나 했을 것이다”고 자신했다. 이 모든 일이 119 신고 후 소방차가 도착한 7분 안에 일어났다. 주민의 손으로 구조된 정 씨는 연기를 마셨지만 병원 치료 결과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장에 출동했던 부산진소방서 소방관들은 당시 모습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지휘차량을 담당했던 권재헌 대원은 “좁은 길로 이루어진 개금동 골목 특성상 진입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고 출동했는데 현장 상황은 반대였다”며 “주민들의 활동을 본 뒤 진입이 쉬웠던 이유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화재조사업무를 맡은 박정진 대원도 “건물에 사람이 있었다면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며 “우리처럼 안전 장구도 없이 맨몸으로 구조 했다는 것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굉장히 용감한 분들이다”고 놀라워 했다.

지난 2월 부산진소방서는 이 씨를 포함해 4명의 시민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 조영이 지휘조사계장은 “위험을 무릅쓴 시민의 용기와 판단력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며 “저를 포함해 출동했던 직원 일동이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당시 현장을 찾았다. 사고 후 3개월이 지난 지금은 벽면과 천장이 하얀 페인트에 덮여져 화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타인을 보고 그 자리에서 구조한 뒤 뿔뿔이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간 이들 덕에 기자는 마음 한편에 따스함이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취재진은 이 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통닭을 드렸다. 그는 “손자가 치킨을 좋아하는데 너무 좋아할 것 같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마지막 질문으로 “만약 그때로 돌아가면 똑같이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당연하다. 우리 동네일인데!”라고 웃었다.

김채호 기자 신지영 작가

※ 제작지원 BNK, 한국주택금융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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