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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20> 부산의 억척 여성, 자갈치 아지매

전국서 모여든 사연 많은 억척녀들 "오이소, 사이소…" 희망을 외쳤다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2014.05.28 20:04
자갈치 아지매는 부산 억척 여성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다. 1970년대 생선을 다듬고 파는 자갈치 아지매 모습. 부산박물관 제공
- 1930년부터 시장 일대 매축
- 건어물 상가~남부민 방파제
- 거대한 매립지 만들어지며
- 생선 장사 아지매들 몰려와

- 한국전에 난전들 늘어나자
- 생존위해 더 억척스러워져
- 행정기관 노점 철거 시도에
- 경찰 껴안고 바다 투신도

- 1960년대부터 전국적 명성
- 현대식 시장 건물 생겼지만
- 어린 자식·병든 남편 위해
- 노점들도 계속 거리 메워

■부산 '억척 여성'들의 역사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부산 여성들은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선 영조 때 문관이었던 홍신유(洪愼猷)는 임진왜란 때 항전하는 동래 여성을 시로 읊었다.

"갯마을 여인네가 관청 다락에 올라. 기왓장 벗겨서 분분히 적을 내리쳤다지. 말을 탄 장군은 어디로 도망했나. 지금껏 그림 그려 부끄럽게 한다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과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이 동래성을 버리고 도망갈 때 기왓장을 깨서 적들에게 던진 동래 여성을 대조시킨 것이다. 부산에서 억척 여성들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에 동래 지방은 다른 지역과 달리 시장의 장사를 거의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해방과 한국전쟁은 또 다른 억척 여성들을 탄생시켰다. 부산에 온 귀환동포, 피란민, 전쟁미망인들은 억척 여성의 대열에 속속 합류했다. 부산 표 억척 여성인 자갈치 아지매는 이런 부산의 여성사가 만든 열매였다.

■부산 자갈치시장의 태동

1970년대 지은 지상 3층 규모의 자갈치시장 건물. 부산박물관 제공
자갈치의 어원은 자갈이 많이 깔린 해변에서 유래했다. 구덕산에서 보수천을 흘러내려 온 돌들이 파도와 부딪쳐 작은 몽돌이 됐다. 일제 강점기 이 해변에서 매축 공사가 이뤄졌기 때문에 몽돌이 깔린 옛 모습은 사진 속에서나 확인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영도대교 입구 쪽에 부산수산회사를 설립했고, 부산 어시장도 개설했다. 당시 남빈(南濱)으로 불렸던 자갈치 해안에서는 범선을 정박시키고, 건해조류를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1910년대 일본인들은 몽돌 해안에 남빈 해수욕장을 열어 해수욕을 즐기기도 했다.

1930년부터 현 자갈치시장 일대에 대규모 매축 공사가 시작됐다. 10년가량 7만8000평이 넘는 해안을 매축한 탓에 지금의 건어물 상가에서 남부민 방파제에 이르는 거대한 매립지가 만들어졌다. 해방 직후에는 미곡창고가 세워졌으며, 하동에서 쌀을 싣고 온다고 해서 '하동뱃머리'라고 불렸다. 이 시절에는 부산데파트 쪽에 있었던 본정시장이 더 컸다. 그런데 영도와 다대포에서 잡아 온 생선을 싱싱하게 팔기 위해서는 해안과 접한 자갈치가 유리해졌다. 생선 장사를 하려는 아지매들이 자갈치로 조금씩 몰리기 시작했다.

■생선 장사에 나선 부산 아지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갈치시장에도 피란민들로 북적거렸다. 자갈치에는 곡물을 거래하는 미곡시장,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품을 파는 소위 양키시장, 어패류를 취급하는 수산물시장 등이 있었다.

수산물시장은 거의 여성들 차지였다. 비린내 나는 생선을 다듬어 파는 아지매들은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이었다.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아이를 키우며 살기 위해 주로 하는 일이 행상이나 난전 일이었다.
노점이 커지고 찾는 손님들도 많아지자 장사를 하려는 아지매들이 더 몰렸다. 남편이 실직하거나 아파서 일하지 못하는 아지매들도 동참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몸뻬를 입은 아지매 부대는 전쟁과 같은 시장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욱 억척스러워졌다. 자갈치 저잣거리에서의 고생을 마다치 않고 헤쳐나가는 그들에게 '자갈치 아지매'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도 이때였다.

자갈치가 노점으로 뒤덮여 시끄러워질 무렵, 행정기관에서는 철거와 단속에 나섰다. 그러나 억척스러운 자갈치 아지매들은 온몸으로 싸우며 삶의 터전을 사수하려 했다. 급기야는 경찰들을 껴안고 바다로 뛰어든 자갈치 아지매 사건이 터졌다. 이 중 한 명이 자갈치 아지매의 원조, 자갈치 왕고참으로 알려진 이선옥 할머니다.

■자갈치시장의 번성

1960년대 자갈치시장은 부산의 경제적 호황과 때를 맞춰 번성했다. 자갈치시장에서 점포와 노점을 합쳐 어패류로 장사하는 상인들은 1350명에 달했다. 하루 평균 1만여 명의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월간 판매고가 무려 3억 원까지 올라갔다. 거제도와 통영 등 남해에서 잡힌 활어와 선어들이 매일 1000여 상자씩 자갈치시장에 들어왔다.

자갈치 명성이 알려지자 김해와 양산 등 경남에서 온 손님들이 늘어났다. 멀리 서울에서 싱싱한 생선회를 맛보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도 있었다. 어느덧 자갈치는 우리나라 대표적 수산물시장이 되었다. 덩달아 자갈치 아지매들 주머니도 두둑해졌다. 아지매들이 돈을 담을 때가 없어서 소쿠리나 마대에 쑤셔 넣을 만큼 자갈치시장은 싱싱한 활황을 맞았다.

1970년대 접어들면 자갈치시장 풍경이 완전히 바뀐다. 1960년대 후반 해안가를 따라 즐비했던 판잣집들이 대부분 철거됐고, 부산항만의 매립도 완료됐다. 수천 명의 상인과 손님, 급증하는 수산물 거래를 물양장 일대의 좁은 공간에서는 소화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정부와 자갈치 상인들이 합의해 현대식 3층 건물의 수산물시장을 지었다. 기존 노점상 연합이었던 '해물상조합'도 '부산어패류처리조합'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상설 점포의 주인이 된 자갈치 아지매의 복장도 점차 빨간 장화에 방수용 앞치마로 바뀌었다. 그런데 난전의 상인들이 현대식 건물 안으로 입주했건만 노점에서 장사하는 자갈치 아지매들이 계속 거리를 메웠다. 자갈치시장은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부산 아지매들의 마지막 보금자리였기 때문이다.

■부산의 새벽을 깨우는 억척 여성들

1980년대 자갈치 아지매는 부지런하고 생활력이 강한 우리나라 여성의 상징이 됐다. 딸린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헌신적인 생활은 부산의 경제를 뒷받침한 버팀목이었다. 부산의 새벽은 자갈치 아지매가 깨운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벽 4시 통금이 풀리자마자 택시를 타는 손님은 거의 자갈치 아지매였다. 이들은 부산 사람의 시계가 되어 어김없이 자갈치시장으로 달려가, 바위에 붙박인 굴처럼 모진 세월을 견뎌냈다. 그 추운 새벽 겨울에도 모닥불을 쬐면서, 높이 뜬 샛별 속에 자식의 얼굴을 떠올리며 장사를 시작했다.

아픈 사연이 있는 아지매들이 계속 자갈치로 모여들었다. 친근한 후배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린 아지매는 어린아이를 업은 채로 자갈치로 왔다.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조개, 해삼, 생굴을 팔아 5년 만에 빚을 청산했다. 10년 동안 앓아누운 남편을 대신해 억척스럽게 장사한 끝에 네 자식을 모두 대학까지 보낸 자갈치 아지매도 등장했다. 한편, 자갈치 아지매는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는 특징이 있다. 타향 출신을 배제하지 않고 시장 공동체로 모두 포용했기에 자갈치 아지매의 브랜드 가치가 높은 것이다. 그리하여 자갈치는 그냥 저잣거리가 아니었다. 가난하고 실패한 여성들이 희망과 생명을 되찾는 아지매의 자궁과 같았다.

얼마 전 부산의 한 민속학자는 자갈치 아지매의 뒤를 이을만한, '깡깡이 아지매'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배 갑판에 묶은 밧줄에 의지한 채 선박의 강판에 달라붙은 녹을 망치로 두드려 제거하는 깡깡이 아지매는 부산의 또 다른 억척 여성이었다. 그들은 영도 조선소 거리의 절벽 같은 삶을 망치 하나로 깡깡거리며 지탱해왔건만 따스한 눈길 한번 받지 못했다. 지금이야말로 지난한 세월을 버티며 험난한 노동에 신음했던, 또 다른 부산 억척 여성의 삶을 조명해 볼 때이다. -끝-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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