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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18> 부산에 '땐스홀'을 허하라- 부산 사람의 춤바람과 성애

법으로 막은 '땐스홀' 숨어서 성업… 은밀한 성애에 가정파탄 사회문제화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2014.05.14 19:40
광복 이후 정부는 댄스홀 규제를 강화했고 부산이 상대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주최의 외교관 초청 파티에서 공개적으로 춤을 추는 일이 잦았을 만큼 춤은 건전했고 일상적이었다. 1959년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 美문화 동경한 여성 폭발적 인기
- 정부 규제에 부산 가장 큰 타격
- 오히려 불법 사설 댄스홀 양산
- 6·25전쟁 중에도 특권층 춤 즐겨

- 비밀 댄스홀서 남녀 불륜 줄이어
- '의형수 간통사건' 등 사회적 파장
- 가부장 사회는 여성 일탈만 비난
- 댄스광-공권력 끈질긴 줄다리기

■'땐스홀'을 폐지하라

광복 이후 미국인 고위 관료가 주최하는 친목 모임에서 사교 댄스 파티가 자주 열렸다. 1959년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광복 이후 미 군정이 들어서자 움츠렸던 '땐스홀(댄스홀)'이 기지개를 켰다. 일제강점기 댄스홀 규제가 심했지만, 미 군정 기간에는 미군과 특정계층이 참여하는 댄스파티가 자주 열렸다. 서양의 사교춤을 접한 끼 있는 여성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왈츠, 탱고, 지르박, 차차차, 맘보 등 남성과 밀착된 상태에서 스텝을 밟아가며 돌리고 흔드는 서양 춤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국 문화를 동경했던 여성들은 사교춤을 출 수 있는 댄스홀을 자유와 해방의 별천지로 여겼다.

접대부뿐만 아니라 가정주부와 여학생까지 댄스홀의 출입이 잦아지자 국가는 경계하기 시작했다. 1947년 남한의 과도정부는 통일정부가 수립돼 조치하기 전까지 댄스홀, 카바레, 바 등 불건전한 영업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유흥업정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법으로 큰 타격을 받을 곳은 부산이라고 지적했다. 요컨대 부산 유흥가에 큰 파문을 던져 호화로운 몸치장과 황금을 꿈꾸는 업자와 기생, 그리고 여급 등이 캄캄한 앞날을 맞을 것으로 예측했다. 1948년에는 댄스홀과 카바레를 폐지하라는 경상남도 부지사의 지시에 따라 부산의 댄스 업소들이 줄줄이 간판을 내렸다.

■전쟁 중에 춤추는 부산의 댄스광

하지만 국가의 힘으로도 막기 어려운 것이 춤바람이었다. 열린 공간에서 배척당한 부산의 댄스홀은 출발부터 어두운 음지에서 자랐다. 댄스홀 억제는 오히려 은밀한 사설 댄스홀을 양산했으며, 끼 있는 부산 사람들을 그늘에서 춤바람나게 만들었다.

한국전쟁 시기에도 부산에서는 댄스 열기가 시들지 않았으며, 댄스홀도 성업 중이었다. 전설의 주먹왕 김두한은 전쟁 중에도 광복동의 댄스 홀 앞에는 고급 세단과 군 고급 장교의 지프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고 회고했다. 젊은 청년들이 전투에서 죽어 나가는 엄중한 시기에 특권층은 댄스홀에서 댄스를 즐기고 있었다. 놀고 즐기는 유한계급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따가운 가운데 수사기관의 댄스홀 압박이 이뤄졌다.

1952년 6월, 군 수사기관은 중앙동의 댄스홀에서 춤을 추던 남녀 수십 명을 체포했다. 남성들 가운데는 세무 부서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다수였고, 여성은 대부분 가정주부였다. 당시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던 시절이었으므로 모두 치안 재판에 회부됐다. 1952년 8월에는 부산경찰서가 댄스광 체포에 나섰다. 이들은 보수동 가정집 2층의 댄스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경찰이 급습하자 댄스홀은 아수라장이 됐다. 혼비백산한 수십 명의 댄스광이 2층에서 뛰어내리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등 진풍경이 벌어졌다.

■비밀 '땐스홀'에서 은밀한 성애

1950년대 미군과 유엔군을 위한 전용 댄스홀은 합법으로 운영됐다. 이를 특수 댄스홀이라 불렀는데 부산에서는 10여 개가 있었다. 여기에는 양공주뿐만 아니라 가정주부와 처녀들이 출입했다. 이와 함께 정부가 공식적으로 허가한 댄스홀들도 있었기에 춤바람을 원천 봉쇄하기는 사실 불가능했다. 수요보다 합법 댄스홀이 적고, 이곳의 입장료가 매우 비싸므로 허가받지 않은 비밀 댄스홀이 우후죽순으로 늘어갔다. 이른바 '콘크리트 집'으로 일컫는 비밀 댄스홀은 1957년께 부산에 70여 개나 있었다. 비밀 댄스홀이 악의 온상이고, 춤바람 때문에 부산시의 풍기가 문란해졌다는 여론이 날을 세웠지만, 춤바람 기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음지에서 싹을 틔운 춤바람은 은밀한 성애의 꽃을 피웠다. 홀 내에서 사교춤을 추다 눈이 맞은 남녀는 이성적 만남을 이어갔으며, 가정이 파괴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1955년에 일어난 '희대의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의 영향 탓인지 부산의 춤바람 사건도 귀추가 주목되었다. 1955년 '의형수 간통사건'으로 알려진 '김모 씨 사건'이 대표적 사례이다. 김 씨는 남편과 의형제를 맺었던 조모 씨와 춤을 추다가 몰래 동거생활까지 했다. 하지만 병든 남편에게 발각돼 결국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부정한 행실이라는 딱지는 김 씨의 여동생들에게도 화가 미쳤다. 처형의 추문을 참지 못한 남편들에게 소박을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왜, 자유부인만 문제인가

1950년대 전쟁미망인이 무려 50만 명이 넘었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다방, 미장원, 요리점 등 업소에 진출했다. 전쟁미망인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지만, 남편이 없으므로 자유롭게 이성 교제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양공주와 성매매 여성들, 서양 댄스에 빠진 여대생과 주부들은 전통과 윤리에 구속되지 않았다. 흔히 '전후파(戰後派) 여성'이라 불리는 이들이 일으키는 사회적 춤바람은 남성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교춤에 빠진 여성들은 과감히 정조관념에서 벗어나거나 가정을 버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춤바람 사건에 관한 비난은 대개 성도덕을 일탈한 자유부인들에게 쏟아졌다. '탈선 유부녀', '댄스에 미친 유부녀' 등 여성의 일탈만을 집중적으로 부각했다. 법적 판결에서도 여성의 죄에 무게를 두었다. 앞선 김 씨 사건에서도 조 씨는 징역 1년을, 김 씨는 징역 1년6개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는 댄스 열풍을 바라보는 국가의 가부장제 시선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문화의 유입과 전통 관념의 해체,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결부된 춤바람은 심상치 않았다. 남성 권위를 옹호했던 국가는 여성의 춤바람과 댄스홀의 출입이 강고한 가부장제 사회를 균열시킬 것으로 여겨 노심초사했다.

■계속되는 춤바람, '땐스홀'을 허하라

1960년대도 춤바람 난 부산 사람과 공권력의 끈질긴 줄다리는 계속됐다. 1961년 10월 부산경찰서는 댄스광 20여 명을 붙잡아 즉결 재판에 회부했고, 1962년 3월 대청동 비밀 댄스홀을 급습해 춤추는 남녀들을 즉결 재판에 넘기고 주인을 수배했다. 1963년 3월에도 대낮에 비밀 댄스홀에서 춤추던 댄스광들을 적발해 연행했다.

춤바람으로 인한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다. 1960년 모 방송국 간부 부인이었던 오모 씨가 30대 제비족과 춤을 추고 정을 통했다가 간통을 알리겠다는 협박을 당했다. 사교댄스에 빠진 부산 상류계층의 50대 부인이 육군 대위 출신의 제비족에게 공갈을 당한 이 사건은 사회적 추문으로 파장이 컸다. 여성의 춤바람에 가정이 파괴되는 사건도 이어졌다. 1962년 전포동의 이모 씨가 춤바람이 나서 남편에게 이혼선언을 하고, 어린 네 자식을 버리고 정부(情夫)와 도망쳐 버렸다. 이 사건은 이 씨 부부가 모두 인텔리 계층이었기에 더욱 화제가 됐다. 1965년 동구에서도 춤바람 난 유부녀가 가족을 버리고 총각과 행방을 감추자 자녀 3명이 비관해 음독자살하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

춤은 일상의 억압과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감성적 행동이다. 이 자유와 해방의 춤을 음지의 댄스홀에서 가둬버릴 때 음란한 독버섯이 자라나는 법이다. 끼 넘치는 부산 사람의 춤바람을 공권력으로 막기보다는 역발상의 슬기로운 지혜가 필요했다. 음지의 댄스홀을 양지로 바꾸고, 부산 사람의 춤바람을 열린 공간에서 해소하는 방안은 없었을까. 다시 말하지만 춤은 결코 음란한 행위가 아니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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