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menu search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17> 오라이, 부산 버스와 안내양

"오라이~"로 인기 얻은 이면엔 혹사·추행… 자율버스 등장 후 역사속으로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2014.05.07 20:09
1980년 부산 서면의 직할시승격기념탑 앞 도로를 다니는 버스들. 공사로 좁아진 도로를 버스와 승용차가 가득 메우고 있다. 부산박물관 제공
- 한때 남성차장 안내 맡았으나
- 불친절·행패에 시민들 불만
- 1961년 여차장으로 전원 교체
- 버스내 분위기 완전히 바뀌어

- 버스회사들 '삥땅' 막기위해
- 안내양 기숙사에 철책 설치도
- 대창운수 화재때 탈출 못해
- 꽃다운 처녀 4명 목숨 잃어

- 인권·복지 사각지대로 지목
- 언론·정치권 질타 이어지자
- 부산 안내양 월급 배로 올라
- 타지역 임금 상승 이끌기도

■교통대란이 일어난 임시수도 부산

부산에서 자동차 운행이 시작된 시기는 1910년대였다. 부산역과 동래온천을 연결하는 12인승 자동차가 부산 시내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는 부산부가 운영하는 부영(府營)버스의 신설이 검토됐고, 1930년대에는 20인승 버스의 운행을 부산 시내에서 볼 수 있었다. 버스와 함께 신종 직업이 탄생했으니 바로 '버스걸'이다. 당시 버스걸은 첨단 직업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장시간 노동과 짓궂은 남성 손님의 농락을 견뎌내야 했다. 일제강점기 신작로를 따라 버스가 운행되었으나 거의 비포장도로였으므로 울퉁불퉁한 노면 탓에 승객들은 차멀미와 현기증으로 고생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에 진입한 미군들은 도로를 닦아 군 차량의 신속한 이동을 꾀했다. 그런데 피란 행렬과 더불어 전국의 차량이 몰려와서 삽시간에 임시수도 부산은 교통지옥이 되었다. 1952년 부산 시내에서는 아침, 저녁마다 100대의 버스와 약 600대의 승합 택시, 40여 대의 전차, 수많은 군용 차량이 뒤섞여 교통 전쟁이 벌어졌다. 세계적으로 부산 시내의 자동차 수가 뉴욕 다음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질서를 무시하고 마구 달리는 차량을 통제하고자 곳곳에 교통경찰을 두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서면에서 시내 각처로 출발하는 버스는 3분마다 출발해야 하지만 승객들은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수지를 맞추기 위해 버스들이 승객을 가득 태운 이후에야 출발했기 때문이다.

■달리는 흉기, 달리는 고철

안내양 없이 운행하는 부산의 시민 자율버스. 1960, 1970년대 버스의 상징이었던 안내양이 1980년대 사라지고 자율버스가 도입됐다. 부산박물관 제공
1965년 부산 인구는 150만 명까지 치솟았지만, 교통 체계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버스가 290여 대로 증설되고, 택시도 700여 대로 늘어났으나 하루 90만 명이 넘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비좁은 마이크로버스 안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꽉 찬 승객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들고 온 생선과 채소가 뒤범벅되어 숨쉬기조차 거북했다.

도로 포장율도 거북이걸음이 이어졌다. 당시 우리나라의 포장도로는 5%에 불과했다. 부산의 도로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나은 편이었음에도 시내 외곽은 거의 비포장도로였다. 노면이 고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로의 굴곡이 심해서 교통사고 우려가 제기됐다. 특히 경사진 도로가 많은 부산에서는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대형 참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1967년에 일어난 동삼동 버스 사고는 그 해 우리나라 10대 교통사고 중의 하나였는데, 5명이 숨지고 46명이 부상한 큰 사고였다.

교통사고의 원인은 불편한 도로뿐만 아니라 운수업체와 차량에도 있었다. 치부에 눈이 먼 운수업자들은 차량 정비에 소홀히 하였고, 운전사들을 혹사했다. 낙후된 상태를 면치 못했던 자동차 공업계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부속품을 손질해 버스를 조립하는 수준이었다. 1960년대 후반 미군의 잉여 부속품마저 동나 차량 정비가 더욱 힘들어졌다. '달리는 흉기, 달리는 고철'이라 불렀던 자동차들이 사고의 위험을 안고 부산의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대창운수 안내양 기숙사 화재 사고
한동안 부산 버스에서는 남성 차장이 안내를 도맡아 했는데, 시민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승객에 대한 불친절과 행패가 심해지자 1961년 부산 버스업계는 명랑사회를 이룩하자며 여차장으로 전원 교체했다. '오라이, 스톱, 어서 오세요' 등 젊은 여성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버스 내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부산의 버스 안내양은 서울의 깍쟁이 안내양에 비해 생선장수의 망태기를 일일이 들어 옮겨주는 등 친절하기로 유명했다. 이런 그들도 하루 18시간 이상의 중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다 보니 '삥땅'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삥땅'은 '돈을 빼앗는다'는 뜻의 '삥친다'에서 온 말이다. 1970년대 발행된 우리말 사전에서는 '삥땅'을 "버스 차장들이 손님한테서 받은 요금 일부를 가로채는 짓"으로 설명할 정도였다. 운수업계는 안내양의 인권을 억압하면서 삥땅을 해결하려고 했다. 이 와중에 부산 연산동 대창운수 안내양 기숙사에서 불행한 화재 사건이 터졌다. 삥땅의 통로로 여겨 창문을 철책으로 막아버린 기숙사에서 큰불이 난 것이다. 이 화재로 4명의 꽃다운 처녀가 불에 타 숨졌고, 1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부산서 시작된 안내양 임금 인상 바람

이 사건은 인권과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안내양의 생활을 수면 위로 떠올리는 계기가 됐다. 대창운수 안내양들은 7평의 방에서 40명이 칼잠을 자고 있었다. 추운 겨울임에도 작은 석유 난로가 유일한 난방 시설이었다. 부산 버스노조에서 실태를 조사한 결과 43개 버스 안내양 기숙사에서 침구를 제대로 갖춘 곳은 2곳에 불과했다. 버스회사에서는 삥땅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휴무일 외출까지 금지했다. 젊은 여성들에 대한 몸수색과 소지품 검사는 늘 있는 일이었다.

언론과 정치권의 질타가 이어지자 부산에서 처음으로 혁신적인 임금 인상안이 나왔다. 1978년 부산 버스 안내양의 임금을 14만 원으로, 배까지 올린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다른 봉급생활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경제적 사건이라 평하며, 대기업 대졸 사원의 초봉에 해당하는 월급이라 치켜세웠다. 하지만 정작 전국 운수업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해 4월에 열린 버스조합대표자 회의는 부산 버스업계 성토장으로 변했다. 부산 버스 안내양의 월급 인상 탓에 다른 지역도 임금 인상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한편, 삥땅의 부조리와 안내양 몸수색을 방지하기 위해 현금이 아닌 승차권을 발급하는 제도가 시행됐다. 이런 조치에도 삥땅의 관습이 완전히 사라지지 못했다. 이 와중에 삥땅을 일소한 것은 자율버스였다. 1980년대 중반 안내양 없이 운행하는 자율버스가 도입되자 삥땅이 사라지는 대신 수천 명의 부산 안내양이 일자리를 잃었다.

■버스 산업의 선두주자, 신진공업사

부산은 버스 산업의 시발지다. 부산 전포동 신진공업사는 우리나라 자동차 공업의 개척자로서 상당한 기여를 했다. 자동차 부품 회사로 출발한 신진공업사는 한국전쟁 이후 고장 난 차를 수리하고 개조하면서 성장했다. 이렇게 초창기 자동차 회사들은 대개 미군의 자동차 부품을 활용하여 자동차를 만드는 재생사업을 통해 발전했다. 자동차 수리와 부품 조립에 노하우가 생긴 신진공업사는 25인승 마이크로버스와 대형 버스까지 제조하기 시작했다. 부산의 신진공업사는 곧 전국 버스의 생산지로 명성을 얻었다. 1967년 서울에서 운행한 시영버스도 부산의 신진공업사가 생산하여 판매한 것이다.

1963년 신진공업사는 우리나라의 첫 승용차인 시발자동차의 뒤를 이어 '신성호'라는 자동차를 출시했다. 비록 망치로 철판을 다듬고, 중고 지프차의 엔진을 장착한 소형자동차였지만 국내산 신성호의 출시는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에서 큰 사건이었다. 이후에도 신진공업사는 가속페달을 밟아 나갔다.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하였고, 일본의 도요타자동차와 기술제휴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자동차 회사로 뛰어올랐다. 1960년대 후반 아시아와 현대자동차는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신진공업사의 매출액이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 자동차 산업의 변화를 읽지 못한 신진공업사는 부도가 나서 결국 정차하고 말았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트위터 페이스북
관련기사
국제신문 뉴스레터

[많이 본 뉴스]

당신의 워라밸 점수는

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