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 표결이 12년 만에 재연된다. 아이러니하게도 12년 전 당시 열린우리당 소속의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던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박근혜 의원'은 이번에는 탄핵 표결 대상인 '박근혜 대통령'이 돼 국회의 결정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게 됐다. 2004년 3월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활짝 미소 짓던 박 대통령은 훗날 자신의 운명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2004년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자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웃고 있다. YTN 캡처

12년 전, 대통령을 탄핵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정치인은 이번에는 탄핵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탄핵을 온몸으로 막아내려던 인물은 탄핵정국을 독려하고 있다. 12년 만에 맞게 된 탄핵정국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돼 있는 등 입장이 뒤바뀐 정치인도 있다.

2004년 탄핵 표결 당시를 기록한 국회 속기록을 보면 "박근혜 의원, 뭐하는 거야!" "박근혜 의원, 공개투표 하지마!"라고 누군가 소리를 지른 것으로 돼 있다. 박 대통령이 기표소를 제대로 가리지 않은 채 사실상 공개투표를 하며 탄핵 찬성을 유도한 것에 대해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항의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새누리당은 의원 개인의 양심에 따라 투표하도록 '자유투표'를 당론으로 채택하고, 표결에 참여하는 의원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은 없어야 한다고 선을 긋고 있다. 야당 일부에서 '투표 인증샷'을 거론하며 탄핵 가결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12년 전 탄핵 표결 전 개별 의원들의 의견을 '크로스 체크'하고 버젓이 공개투표까지 했던 새누리당이 이번 탄핵에서는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당시 탄핵안 가결 이후 한나라당이 역풍을 맞았을 때 당의 구원투수 역할을 한 것은 박 대통령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탄핵을 주도한 최병렬 대표 대신 박 대통령을 대표로 추대했고, 박 대통령은 천막 당사로 이전하며 민심 수습에 성공해 탄핵 역풍을 수습한 주역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지금 박 대통령은 12년 전 탄핵정국의 부메랑을 맞고 정치 생명이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으로 의장석을 점거하고 농성하며 탄핵안 저지에 앞장섰던 정세균 국회의장은 이번에는 의장석에서 의사봉을 잡는 자리에 서 있다. 정 의장은 탄핵안 발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탄핵안 표결은 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 탄핵안 표결에 반대했던 이종걸 송영길 의원 등 야권 의원들도 탄핵을 앞장서서 통과시킨다는 입장이다.

국민의당 정동영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과거에는 각각 '탄핵 반대'와 '탄핵 추진'이라는 입장에서 대립했지만 이번에는 탄핵 가결을 위해 손을 맞잡았다. 추 대표는 당시 탄핵에 찬성한 것을 자신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이번 탄핵안 표결에 정치 명운을 건 추 대표는 표결을 하루 앞둔 8일 "탄핵만이 유일한 국정 정상화 방안이자 수습 방안이고, 적폐를 청산하고 역사를 다시 쓰는 길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말했다. 정 의원도 "탄핵 부결을 시도한 세력은 정치적으로 소멸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탄핵 가결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김태경 기자 tgki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