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중세 고려 국왕의 나라 안팎 자세
천명 받들어 백성 다스려…황제·왕 명칭 이중적 운영팔관회 등 통해 실용 외교, 새 대통령 타산지석 삼길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우여곡절 끝에 새 대통령이 탄생했다.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 간 갈라치기, 남녀·세대 간 극한 혐오는 여전히 생채기로 남아있다. 국내의 갈등 증폭을 해결하려면 진정 필요한 화두가 사회통합과 공정이다. 가장 큰 통합체인 국가는 견제와 균형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참여와 자유, 공존을 꾀해야 한다. 현실적 이념이 되는 자유, 그러나 자유가 부재한 곳에서 정의는 자칫 국가나 힘센 자들의 억압용 무기가 될 수 있다. 반면 정의가 없는 곳에서 자유는 방종이 된다.
대통령에 비견되는 것은 국왕이다. 국가 안팎의 굳건한 위상과 견제 장치의 원활한 작동, 상호작용을 통한 공공선의 구현은 이미 고려 국왕에게서 찾아진다. 고려의 국왕은 초월적 천(하늘)의 대변자로서 천명을 받는 존재이다. 고려 건국 이후 유교가 현실 정치 이념으로 정착한 성종·현종 대 천명사상은 본격화했다. 천명사상에 따르면 국왕의 위상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인간이 고쳐 쓸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됐다. 천명은 왕건과 그 후손으로서 국왕이 되는 사람만이 받았고, 왕건 후손의 왕위 계승에 정당성을 보장하는 기능을 한 ‘용손(용의 후손)’ 관념으로 표출됐다.
고려 국왕을 칭하는 용어는 천자 황제 계하이다. ‘보한집’에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올린 글에서, 태조 왕건 대에 천자 호칭이 확인된다. 왕건은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천수 연호도 채택해서 썼다. 광종 7년 ‘퇴화군대사종’ 명문에서 황제 칭호가 등장한다. 고려는 중국의 황제 천자를 빌려 국가 자존의식을 높였지만, 공식적으로는 대왕·왕 호칭도 번갈아 썼다.
고려 군주의 위격은 황제 황가로 인식되는가 하면 황제 시스템도 갖춰졌다. 광종 대에는 수도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라 불렀다. 중국에 대해 화풍 중심의 관념을 보이던 성종조차도 황제 제도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고려 군주를 천자 황제로 칭할 수 있던 데는 국제질서의 변화도 뒷받침됐다. 당 멸망 이후 절대강자가 없었기에 각국은 자국의 군주권 강화 시점을 맞춰 황제라 자칭할 수 있었다.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기 이전 외왕내제 시스템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밖으로는 왕, 안으로는 황제를 칭하는 외왕내제는 이중적이지만 효율적인 운영 방식이었다. 국가 바깥의 큰 갈등, 심지어 국제 전쟁까지 초래할 수 있는 황제 위호의 사용은 공식적 대외관계에서는 절제했다. 고려는 천하를 이룬 송·요·금·서하 등 대국과는 책봉과 동시에 주체적 관계를 맺어야했다. 고려의 주체적 외교를 소위 ‘팔관회적 질서’라 한다. 팔관회는 원래 추수 감사제이자 불교 행사로 개경 서경 두 곳에서 치러졌다. 팔관회 일정(음력 10·11월)에 맞춰 외국 상인이 고려에 와서 국왕에게 물품을 바치면 답례하고 연회를 베풀어줬다. 당시 외교 의전에서 국왕은 신하 된 방향인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지 않고, 주인 된 자세인 서쪽을 바라봤다. 고려 중심의 천하 질서를 외교의전에서도 이렇듯 당당하게 구현해 냈다.
뒤이은 원 간섭기의 지식인은 천하가 원에 의해 통일되더라도 요동에는 별도의 천하인 ‘동국’ 고려가 존재한 것으로 인식했다. 본디 요동 해동은 지리적으로 요하이동·황해동쪽·바다 동쪽을 뜻한다. 고려에 들어가 해동·요동은 해서인 중국과 구분 짓는 독자적 영역을 관칭한 개념으로 치환됐다. 원 간섭 당시 원이 천하를 통일해 다스린 상황을 목도하고 이를 수용한 고려 사람에게는 원과의 관계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이었다. 원에 대항해 고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가 하면, 일부는 원이 상국이자 중화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한 선에서 고려 국가 자신을 새롭게 위치지우는 탄력적 생존 전략도 구사했다. 고려 전기 이래의 외왕내제, 원간섭기 대일통 속 동국이라는 자존감은 능동적이고 유연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한다.
고려 국왕은 독주로 전제하지 않았다. 군주성학론에서 군주가 성인이 되는 방법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정심, 단정히 하는 단심, 진실한 마음인 실심, 마음을 잘 견지하는 존심, 정성스러운 성심에 있다. 이 마음이 합치되는 화충, 견해 차이를 극복하는 절충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고려 지배층 또한 국왕을 초월적 존재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국왕의 국정주도를 기대하면서도 신료와 함께 다스려야 한다는 견해를 제출했다. 국왕과 신료 사이 군신 공치 이념은 당연히 백성을 살리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고려는 공존과 조화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통합하는 범위 내 각각의 요구사항과 독립성을 인정해 줬다.
계엄·탄핵·대선의 긴 터널 끝에, 49% 득표율로 이재명 대통령이 선출됐다. 절반으로 쪼개진 국론, 갈등과 내홍을 봉합하고 상처받은 재외 국민을 위해 실추된 나라의 위상을 올곧게 세우길 대통령에게 기대한다. 나아가 다변화된 국제질서 속 탄력적 외교 자세도 요구된다. 여기엔 통합과 다원, 독자적 실용 외교를 하던 고려가 모형이 될 것이다.
대통령에 비견되는 것은 국왕이다. 국가 안팎의 굳건한 위상과 견제 장치의 원활한 작동, 상호작용을 통한 공공선의 구현은 이미 고려 국왕에게서 찾아진다. 고려의 국왕은 초월적 천(하늘)의 대변자로서 천명을 받는 존재이다. 고려 건국 이후 유교가 현실 정치 이념으로 정착한 성종·현종 대 천명사상은 본격화했다. 천명사상에 따르면 국왕의 위상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인간이 고쳐 쓸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됐다. 천명은 왕건과 그 후손으로서 국왕이 되는 사람만이 받았고, 왕건 후손의 왕위 계승에 정당성을 보장하는 기능을 한 ‘용손(용의 후손)’ 관념으로 표출됐다.
고려 국왕을 칭하는 용어는 천자 황제 계하이다. ‘보한집’에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올린 글에서, 태조 왕건 대에 천자 호칭이 확인된다. 왕건은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천수 연호도 채택해서 썼다. 광종 7년 ‘퇴화군대사종’ 명문에서 황제 칭호가 등장한다. 고려는 중국의 황제 천자를 빌려 국가 자존의식을 높였지만, 공식적으로는 대왕·왕 호칭도 번갈아 썼다.
고려 군주의 위격은 황제 황가로 인식되는가 하면 황제 시스템도 갖춰졌다. 광종 대에는 수도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라 불렀다. 중국에 대해 화풍 중심의 관념을 보이던 성종조차도 황제 제도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고려 군주를 천자 황제로 칭할 수 있던 데는 국제질서의 변화도 뒷받침됐다. 당 멸망 이후 절대강자가 없었기에 각국은 자국의 군주권 강화 시점을 맞춰 황제라 자칭할 수 있었다.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기 이전 외왕내제 시스템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밖으로는 왕, 안으로는 황제를 칭하는 외왕내제는 이중적이지만 효율적인 운영 방식이었다. 국가 바깥의 큰 갈등, 심지어 국제 전쟁까지 초래할 수 있는 황제 위호의 사용은 공식적 대외관계에서는 절제했다. 고려는 천하를 이룬 송·요·금·서하 등 대국과는 책봉과 동시에 주체적 관계를 맺어야했다. 고려의 주체적 외교를 소위 ‘팔관회적 질서’라 한다. 팔관회는 원래 추수 감사제이자 불교 행사로 개경 서경 두 곳에서 치러졌다. 팔관회 일정(음력 10·11월)에 맞춰 외국 상인이 고려에 와서 국왕에게 물품을 바치면 답례하고 연회를 베풀어줬다. 당시 외교 의전에서 국왕은 신하 된 방향인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지 않고, 주인 된 자세인 서쪽을 바라봤다. 고려 중심의 천하 질서를 외교의전에서도 이렇듯 당당하게 구현해 냈다.
뒤이은 원 간섭기의 지식인은 천하가 원에 의해 통일되더라도 요동에는 별도의 천하인 ‘동국’ 고려가 존재한 것으로 인식했다. 본디 요동 해동은 지리적으로 요하이동·황해동쪽·바다 동쪽을 뜻한다. 고려에 들어가 해동·요동은 해서인 중국과 구분 짓는 독자적 영역을 관칭한 개념으로 치환됐다. 원 간섭 당시 원이 천하를 통일해 다스린 상황을 목도하고 이를 수용한 고려 사람에게는 원과의 관계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이었다. 원에 대항해 고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가 하면, 일부는 원이 상국이자 중화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한 선에서 고려 국가 자신을 새롭게 위치지우는 탄력적 생존 전략도 구사했다. 고려 전기 이래의 외왕내제, 원간섭기 대일통 속 동국이라는 자존감은 능동적이고 유연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한다.
고려 국왕은 독주로 전제하지 않았다. 군주성학론에서 군주가 성인이 되는 방법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정심, 단정히 하는 단심, 진실한 마음인 실심, 마음을 잘 견지하는 존심, 정성스러운 성심에 있다. 이 마음이 합치되는 화충, 견해 차이를 극복하는 절충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고려 지배층 또한 국왕을 초월적 존재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국왕의 국정주도를 기대하면서도 신료와 함께 다스려야 한다는 견해를 제출했다. 국왕과 신료 사이 군신 공치 이념은 당연히 백성을 살리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고려는 공존과 조화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통합하는 범위 내 각각의 요구사항과 독립성을 인정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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