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우리나라엔 ‘등화관제 훈련’이 있었다. 적의 야간공습에 대비하는 훈련 일환이다. 당시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시내가 어둠에 잠겼다. 간혹 들리는 “불을 꺼라”는 민방위 대원의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불빛이 새나갈까봐 이불을 뒤집어 쓰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촛불을 켜고 숙제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암흑 도시에 많은 시민이 막연한 공포감을 느꼈다. 경제적 손실, 교통 문제 등 생활 불편 민원도 늘었다. 1990년 11월 ‘등화관제 훈련’이 없어진 이유다.

일부러 불을 끈 게 아니라 갑자기 전기가 동시에 모두 끊기는 정전사태가 발생한다면 얼마나 두려울까.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지난달 28일 대규모 정전(블랙아웃) 사태가 벌어졌다. 스페인과 국경을 맞댄 프랑스 남부 일부도 피해를 봤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인근의 전력 시스템에서 시작된 정전은 스페인 전역과 포르투갈 일부 지역으로 확대됐다. 항공 철도 인터넷망 휴대전화 등 전기를 쓰는 모든 기반 시설이 일제히 멈춰 사회적 대혼란이 빚어졌다.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아 교통이 마비되고, 지하철과 엘리베이터가 제대로 운행되지 않는 바람에 사람이 갇히는 등 곳곳에서 사고가 났다. 18시간 지속된 대정전으로 스페인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고 7조 원 넘는 경제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관측됐다.

블랙아웃은 심심찮게 벌어지는 재난이다. 1997년 7월 13일 미국 뉴욕에선 한 변전소에 벼락이 떨어져 대정전 사태가 발생했다. 암흑을 틈탄 대규모 약탈과 방화로 도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됐다. 우리나라에서도 2011년 9월 15일 전국적으로 블랙아웃 현상이 일어났다. 전력 당국이 지역별로 돌아가며 전력 공급을 일시 중단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다. 전국 656만 가구가 피해를 봤고 공장 가동이 중단됐다. 빗나간 수요 예측과 성급한 단전이 초래한 결과다.

이번 유럽 블랙아웃 원인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극심한 기온차로 송전선에 이상 진동이 발생해 전력수급이 불안정한 탓이라는 추정이 나온다. 이상기후가 원인이라는 것이다. 일각에선 유럽이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를 집중 육성하면서 전력 생산·공급에 문제가 생겼다고 분석한다. 전 세계적으로 한여름 전력 수요 급증에 따라 전력 부족 현상이 일상화됐다. 인공지능(AI) 산업 육성은 전기 수요를 더 필요로 한다. 정부는 안정적 전력확보와 블랙아웃 대응 매뉴얼을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다.

이은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