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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 재촉말고 돌아보게나…붉게 익은 오대산의 가르침

오대산 선재길 단풍
김성효 선임기자 kimsh@kookje.co.kr | 2026.10.2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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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탐방객들이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선재길을 걸으며 단풍을 감상하고 있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어지는 선재길은 전 구간이 평탄한 데다 아름드리 나무와 계곡 등 다양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김성효 선임기자
- 평창 월정사 ~ 상원사 9㎞ 숲길
- 계곡따라 평탄…남녀노소 추천
- 붉은 단풍·노란 활엽수·상록수
- 계절이 남긴 色 차곡차곡 쌓여

- 화전민 터 세월의 무상함 전해
- 조선 세조 전설 깃든 천년고찰
- 산사·고목 한 폭의 진경산수화

가을이 깊어지면 산은 말없이 옷을 갈아입는다. 여름을 견뎌낸 나뭇잎은 붉고 노란 빛으로 물들고, 숲길 위에는 계절이 남긴 색채가 차곡차곡 쌓인다.

강원도 평창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어지는 선재길. 가을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는 이 길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천년 고찰의 고요함, 그리고 역사와 전설이 켜켜이 쌓인 스토리텔링을 한 걸음씩 마주하는 여정이다.

■가을의 다양한 얼굴 만나는 길

세조가 문수동자를 만나 병을 고쳤다는 설화에서 만든 5구간 왕의길. 김성효 선임기자
월정사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숲길에 들어서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전나무들이 가장 먼저 반긴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오대산 중대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조성하고 그 중심 사찰로 창건한 월정사는 오대산 문수신앙의 뿌리다. 고려시대 다각다층석탑의 걸작인 팔각구층석탑(국보)과 탑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석조보살좌상(국보)이 천년 사찰의 기품을 증명한다.

수백 년 세월을 견뎌온 전나무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거대한 숲의 회랑을 이룬다. 짙은 초록을 품은 전나무 사이로 붉고 노란 활엽수가 어우러지며 선재길의 가을은 한층 깊어진다. 화려하지만 요란하지 않은 풍경이다. 햇살이 비치는 곳마다 빛깔이 오묘하게 바뀌고, 바람이 지날 때마다 떨어진 나뭇잎은 계곡물을 따라 흘러간다.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마저 길의 신호음이 된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선재길은 약 9㎞에 이르는 숲길이다. 걷는 속도와 중간 휴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4, 5시간 정도면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가파른 산길과 달리 오대천 계곡을 따라 평탄하게 이어져 남녀노소 비교적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다만 구간마다 노면 상태가 다르고 비가 온 뒤에는 미끄러운 곳이 있어 편안한 등산화 준비는 필수다.

선재길의 매력은 구간마다 각기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점이다. 월정사를 지나 본격적인 숲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산림철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오대산의 울창한 수목을 수탈하기 위해 제재소를 세웠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은 화전민들이 살던 터와 숯가마 터가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전한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면 징검다리와 섶다리가 놓인 ‘오대천 계곡 구간’에 도달한다. 바위 사이를 돌아 흐르는 물줄기와 돌 위로 내려앉은 낙엽이 가을의 정취를 더한다. 물소리는 일정한 리듬으로 숲을 채운다. 때로는 가까이에서 힘차게 흐르고, 때로는 나무 사이로 멀어지며 희미해진다. 걷는 이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계곡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잡으려 서두를 이유도, 뒤처질까 조급해할 이유도 없다.

길 중반부를 지나면 신선이 노닐었다는 ‘동피골’과 선재길의 최고 단풍 명소로 꼽히는 ‘멸진대 구간’이 펼쳐진다. 멸진(滅盡)은 번뇌와 집착을 다 태워 없앤다는 불교적 의미다. 붉은 단풍나무와 노란 활엽수, 상록수가 자아내는 다채로운 가색(秋色) 아래서 걸음마다 마음에 쌓인 시름을 털어내게 된다.
‘선재길’이라는 이름 역시 불교적 서사에서 비롯됐다. ‘화엄경’에 등장하는 선재동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53명의 선지식(스승)을 찾아 길을 떠난다. 길 위에서 사람과 세상을 만나며 지혜를 얻었던 선재동자의 여정처럼, 이 숲길 역시 걷는 이에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건넨다. 목적지에 빠르게 다다르는 것보다 그곳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일깨워준다.

숲길을 걷다 보면 단풍의 색깔만큼이나 다양한 풍경을 만난다. 나무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계곡, 물길을 건너는 작은 나무다리, 숲이 잠시 열리며 펼쳐지는 산자락의 가을빛이 감탄을 자아낸다. 바위에 앉아 물소리를 듣는 이,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가족, 보폭을 맞춘 노부부의 모습까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찾아왔지만 숲에 들어서면 모두의 걸음은 한결 느려진다.

가을 산행의 즐거움은 단풍이 가장 짙은 순간에만 있지 않다. 나뭇가지 끝에 남은 초록과 막 붉어지기 시작한 잎, 이미 땅에 내려앉은 낙엽이 공존할 때 숲은 한층 입체적이고 깊어진다. 완벽하게 물든 풍경보다 서로 다른 계절의 흔적이 공존하는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선재길은 그렇게 가을의 여러 얼굴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선재길 끝자락서 마주한 천년고찰

화전민들의 애환이 서린 선재길 4구간 화전민길. 김성효 선임기자
선재길의 끝자락 ‘출렁다리’를 건너 상원사에 가까워질수록 여정은 고즈넉함과 신비로움을 더한다. 신라 성덕왕 때 창건된 상원사는 오대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산사로, 특히 조선 제7대 임금 세조와 얽힌 드라마틱한 전설들로 유명하다.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후 극심한 피부병(등창)으로 고통받던 세조가 오대천 계곡에서 홀로 몸을 씻던 중, 지나가던 동자승에게 등을 씻겨달라 부탁했다. 세조가 “어디 가서 왕의 등을 씻어주었다고 말하지 마라”고 하자, 동자승은 “전하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며 사라졌고 세조의 병은 씻은 듯 나았다. 감격한 세조가 친견한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 바로 국보인 ‘목조문수동자좌상’이다. 불상 내부 조사 당시 세조의 피적삼이 실제 발견되어 전설의 깊이를 더했다. 법당으로 들어서려는 세조의 옷소매를 물어 자객의 암살을 막았다는 ‘고양이 석상’, 그리고 성덕왕 24년(725년) 주조되어 아름다운 비천상이 새겨진 국내 가장 오래된 ‘상원사 동종(국보)’까지 곳곳이 천년 역사박물관이다.

상원사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면, 산사의 처마와 고목, 주변 산자락의 가을빛이 한 폭의 진경산수화처럼 어우러진다. 이곳까지 걸어온 시간은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다. 숲의 향을 맡고 계곡 소리를 들으며, 옛이야기와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시간이다. 단풍을 보러 왔다가 마음의 속도까지 늦추고 돌아가게 되는 이유다.

오대산 선재길은 화려한 단풍 명소인 동시에 ‘천천히 걷는 법’을 일깨워주는 길이다. 눈앞의 풍경을 담으려면 서두르지 않아야 하고, 숲의 소리를 들으려면 잠시 말을 멈춰야 한다.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작은 풍경들이 이곳에서는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 장면이 된다.

가을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나뭇잎은 바람에 떨어지고, 붉고 노란 숲은 머지않아 겨울의 빛깔로 바뀔 것이다. 그러나 천년의 역사와 전설, 그리고 단풍을 따라 걸으며 만난 오대산의 가을은 숲길에 쌓인 낙엽처럼 마음속에 차곡차곡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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