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대한민국 조선 산업의 중심지였던 부산 영도는 1970년대 선박수리업 전성기 시절 활기가 가득한 섬이었다. 하지만 조선업 불황으로 조선소가 하나둘 문을 닫으며 급격히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그 이후 풍경은 우리의 기억 속에 선명하다. 불이 꺼진 채 방치된 빈집, 청년과 어린이를 찾아보기 힘든 거리. 문을 닫은 공장은 도심 속 흉물로 전락했고, 이따금 들려오는 기계의 굉음과 어선 경적만이 메아리처럼 섬을 감쌌다.

부산 영도구 봉래동의 대중목욕탕 ‘봉래탕’ 건물 5층에 자리한 ‘라운지 일렁’의 내부 모습. 원래 봉래탕 가족이 거주하던 공간을 매끈연구소 안지현 소장의 제안으로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김태훈 기자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영도에 낯익은 듯 낯선 풍경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조선소 노동자들이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리던 동네 목욕탕은 지친 마음을 씻으려는 청년들의 발길로 활기를 띠고, 기계 소리와 분진에 파묻혀 있던 폐공장은 클래식 음악과 고기 굽는 연기로 가득하다. 바닷바람을 가르는 집라인 아래로 푸른 파도 대신 재즈의 선율이 출렁인다. 익숙했던 일상에 새로운 감각과 취향이 덧입혀지며 영도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문화를 입고 다시 태어난 영도의 이색적인 공간을 소개한다.

■몸 대신 ‘마음’ 씻는 목욕탕

부산 영도와 남포동을 잇는 부산대교 초입에 자리한 ‘봉래탕’(영도구 봉래동)은 1986년 개업해 39년째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동네 목욕탕이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목욕탕을 6년 전부터 아들인 이영훈 대표가 물려받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국제신문 지난해 7월 1일 자 8면 보도).

2대째 이어온 목욕탕의 이야기는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봉래탕이 특별한 이유는 목욕탕 위층에 자리한 공간에 있다.

봉래탕은 5층짜리 건물의 2, 3층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같은 건물 5층에는 몸 대신 마음을 씻는 쉼터 ‘라운지 일렁’이 있다. 이곳은 원래 이 대표 가족이 거주하던 공간이었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목욕 문화를 소개하고 있는 매끈연구소 안지현 소장(라운지 일렁 대표)이 이곳을 라운지로 꾸미자고 제안했고, 이 대표가 흔쾌히 집을 내어주며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탄생해 지난달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1980년대 감성 가득한 목재 벽 인테리어와 사우나 키가 꽂힌 신발장이 방문객을 반긴다. 디퓨저 향 대신 퍼지는 은은한 오이 비누 향은 어릴 적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때를 밀던 그때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라운지는 저마다 매력을 뽐내는 7개의 방으로 구성돼 있다. 입구 왼편의 ‘전시-굿즈존’에는 때수건을 닮은 열쇠고리와 공책 등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판매한다. 맞은편에는 목욕 문화를 다룬 책으로 가득한 ‘일렁 서재’와 ‘그림책방’이 있다. ‘청음실’은 비치된 턴테이블과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인기를 끄는 것은 안 소장이 직접 제작한 샤워기 모양의 스피커이다. CD를 골라 플레이어에 넣은 뒤 샤워기를 귀를 가져다 대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방식이다. 이 밖에도 조용히 글을 쓰며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필사방’과 추억의 바나나맛 우유, 러버덕 젤리가 올라간 디저트(사진)를 맛볼 수 있는 ‘라운지 바’, 일본의 사우나 인테리어에서 영감을 받은 ‘사우나방’ 등 곳곳에 목욕탕 감성이 스며 있다.

몸과 마음을 함께 데울 수 있는 이벤트도 운영 중이다. 핸드드립 커피와 봉래탕 이용권이 포함된 세트 메뉴(1만2500원)를 판매하고 있으며, 온라인에 후기를 남기면 때수건을 증정하는 행사도 진행 중이다.

안 소장은 “라운지 일렁은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며 “앞으로 어르신 대상 요가 프로그램이나 동네 목욕탕 투어처럼 목욕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라운지 일렁의 운영 시간은 수~일요일 낮 12시~밤 10시이며, 월·화요일은 휴무이다.

■집라인 타고 바다 가르고 재즈 라이브도

2023년 12월 문을 연 ‘태종대 오션플라잉 테마파크’(영도구 동삼동)는 국내 여행객보다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더 유명한 곳이다. 전체 방문객의 절반 이상이 중화권 관광객일 정도이다.

이곳은 집라인(사진) 탑승장과 카페가 있는 상부와 집라인 하차장이 있는 하부 등 2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방문객의 편의를 위해 운영 시간 내에는 두 곳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상시 운영 중이다. 오션플라잉의 핵심시설은 ‘중리산·감지해변·옛 자유랜드 주차장’을 잇는 총길이 653ｍ의 집라인이다. 최대 시속 70㎞로 하늘을 가르며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감지해변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집라인 탑승장 아래층에는 ‘스릴온더머그’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다. 이곳에서는 파노라마 유리창을 통해 탁 트인 바다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시시각각 오가는 선박들이 영도 바다만의 독특한 정취를 자아낸다. 특히 매주 토요일 오후 7시 카페에서 라이브 재즈 공연이 열려 저녁노을이 드리운 바다를 배경으로 감미로운 선율이 어우러지는 낭만적인 시간을 선사한다.

한편, 하부 공간에 마련돼 있던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시설은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새로운 콘텐츠로 리뉴얼해 다시 문을 열 예정이다. 집라인 운영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 카페는 오전 10시부터 밤 9시30분까지 문을 연다.

■음식·음악 어우러지는 도심 속 캠핑

넓게 깔린 잔디밭 한가운데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 사방을 둘러싼 울타리와 나무들, 지글지글 고기를 굽는 연기까지…. 마치 도심을 벗어나 깊은 숲속 캠핑장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몽작’(영도구 남항동·사진)은 캠핑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색 식당이다. 나무와 울타리로 외부와 완전히 차단돼 있어 밖에서는 이곳이 고깃집이라는 사실을 알기 어려울 정도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폐공장이었던 이곳은 리모델링을 거쳐 ‘캠핑 감성’이 물씬 풍기는 핫플레이스로 다시 태어났다.

매장은 2층으로 이뤄져 있는데, 총 17곳의 독립 공간을 갖췄다. 1층은 통유리창으로 외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방 형태, 2층은 텐트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좌석으로 꾸며져 있어 일반 고깃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가족·친구들과 프라이빗한 식사가 가능하다.

이용 방법은 고기와 채소를 홀에서 직접 구매해 구워 먹는 셀프 바비큐 방식으로, 라면 치즈 새우 등 다양한 사이드 메뉴도 판매한다. 맥주부터 와인, 위스키까지 주류도 종류별로 갖춰져 있어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매장 중앙에는 너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실제 모닥불을 피워 마시멜로를 구워 먹으며 불멍을 때리는 방문객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빈백과 해먹 등 휴식 공간도 곳곳에 마련돼 있어 식사 전후 여유를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반려동물 입장도 가능해 가족 단위 손님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

최근에는 ‘문화 공연’도 더해졌다. 지난달부터 평일 오후 7시와 밤 10시, 하루 두 차례 라이브 공연을 열고 있다. 1부는 현악 4중주의 잔잔한 선율을, 2부는 버스킹 공연으로 구성돼 음식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몽작 유위태 대표는 “식사하면서 편하게 공연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며 “처음에는 단기 이벤트로 기획했는데, 반응이 좋아 앞으로도 공연 프로그램을 꾸준히 이어갈 생각이다”고 말했다. 운영 시간은 평일 오후 5시~밤 11시30분, 토요일 오후 1시~밤 10시30분, 일요일 낮 12시30분~밤 10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