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인간극장] <15> 함양방짜유기 - 이점식 방짜유기장
수 천 번 두드림의 미학 ‘황금빛 유기’… 그 기술로 외국악기 제작의 꿈
홍정민 PD hong1225@kookje.co.kr, 이우정 PD
| 2022.05.03 19:31
- 달구며 망치질로 매끈하게 한 뒤
- 직접 두께 조절해가며 소리 조율
- 경쾌한 울림 주는 꽹과리로 탄생
- 신라 때부터 함양 유기공방 성행
- ‘징장’ 부친 가업 이은 이 유기장
- 두 아들도 전수생으로 전통 이어
- “유기로 심벌즈 만드는 게 목표”
수 천 번 망치질로 탄생하는 놋쇠 그릇 유기(鍮器). 그 중 최고는 징과 꽹과리다. 유기 중 악기는 제작과정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최근 취재팀은 경남 함양 서하면에서 이점식(63) 방짜유기장(경남 무형문화재 44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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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름질(울음잡기) 중인 이점식 방짜유기장. 이우정P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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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점식 방짜유기장. 이우정PD |
이제 열기가 식은 바둑에 소리를 입힐 차례. 징·꽹과리 같은 악기와 유기 그릇은 두께에 차이가 있다. “유기 그릇은 일정한 두께로 만들지만 악기는 중심부와 가장자리의 두께가 달라요. 두께의 미세한 차이가 소리를 만듭니다.”
이 유기장은 매끈해진 바둑에 직접 홈을 새기고 두께를 조절하며 소리를 조율했다. “아무리 기계가 발달해도 사람처럼 악기를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직접 다듬으면서 조율해야 돼요. 소리를 불어 넣는 과정이죠.” 이 유기장의 손길에 둔탁한 소리를 내던 바둑은 어느새 경쾌한 울림을 발산하는 꽹과리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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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수장학생 아들들과 작업 중인 이 유기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
다시 가마에서 겹쳐둔 바둑을 꺼내 한장 씩 때어낸다(냄질). 이 유기장은 “냄질하면 이제 우글우글한 표면을 망치로 두드려 잡아주는 ‘닥침질’을 합니다. 그런 다음 바둑 표면을 갈아서 꽹과리와 비슷한 모양을 만드는 ‘부질’이 이어지죠”라고 설명했다. 모양이 어느 정도 완성된 바둑은 담금질을 거친 뒤 소리를 조율한다(벼름질 또는 울음잡기). 마지막으로 표면에 시커먼 자국을 갈아내는 작업(가질)이 끝나면 비로소 악기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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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방짜유기 공장에서 생산하는 유기 그릇과 꽹과리. 이우정PD |
이 유기장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함양에 징점(징 공방)이 16곳이나 있었다. 1년 중에 여름을 제외하고는 보부상들이 장날이 되기 전에 징을 10개씩 사가고 그랬다” 며 과거를 회상했다.근대화와 함께 유기공장에도 기계가 도입되면서 많은 공방이 문을 닫았다. 함양에서 징을 만들던 이 유기장의 부친 이용구 징장은 서울로 올라가 징 제작을 이어간다. 당시 16살이었던 이 유기장은 중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유기 제작을 배웠다. “유기를 접한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어린시절부터 온 동네가 유기를 만들면서 서로 도우며 살았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가업을 잇는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배웠습니다.”
이 유기장은 서울 염창동에서 부친과 함께 지인의 일감을 받아 생계를 이어갔다. “군대 전역하고 머리 자라기도 전에 싱가포르에 1년 동안 건설노동자로 일하러 갔어요. 돈 벌러. 한 1000만 원을 벌어서 귀국했어요.” 그때 1000만 원이면 서울에 60평 단독주택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아버지가 집 사자고 했죠. 근데 저는 유기 공장을 짓자고 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이어나가자고 설득한 거죠.”
마침내 서울 수색에서 방짜유기 공장을 열었다. ‘함양에서 온 방짜유기 공장이 생겼다’는 소식에 전국에서 제작의뢰가 들어왔다. 전국 도매상들이 와서 사갈 만큼 전성기였다.
이 부자는 2년간 서울에서 공장을 운영하다 함양으로 귀향했다. “경남 거창에서 유기 일을 하시던 지인이랑 함께 작업하게 되면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됐어요.” 부친 이용구 선생이 은퇴하면서 현재는 이 유기장이 모든 일을 맡고 있다.
이 유기장은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기 제작에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 때문이다. “주석이 원래는 1kg당 1만8000원에서 2만 원 했는데 지금은 6만 원까지 올랐어요. 동도 6000원 하던 게 1만5000원까지 폭등했습니다. 우리 물건을 사가는 도매상들이 마진을 남길 수가 없을 정도에요.”
펜데믹으로 방문객 발길도 크게 줄었다. 이 유기장이 백화점이나 홈쇼핑까지 판로를 개척하고 있는 이유다. “이 공장도 빚으로 시작했는데 지금 물가가 다 오르니까 빚을 다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유기장은 방짜유기장이라는 책임감 하나로 버티고 있다.
열 여섯부터 시작해 예순이 넘은 현재까지 이 유기장의 인생은 방짜유기로 가득하다. “지금이라도 당장 관두고 싶어요. 그러나 우리 전통 기술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넘어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쉽게 놓을 수가 없어요.” 그의 두 아들도 현재 방짜유기 전수장학생으로 교육을 받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올해 이수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 삼대에 걸쳐 전통을 지켜나가고 있는 셈이다.
“심벌즈(두 개의 원반을 서로 맞부딪혀 소리를 내는 금속 타악기)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이 유기장은 오래 동안 간직한 계획을 소개했다. “심벌즈가 유기랑 거의 똑같아요. 우리 기술로 심벌즈를 만들어 보는 게 목표입니다.” 아직 그의 목표는 현재진행형. 머지 않아 함양방짜유기 기술로 만든 심벌즈를 콘서트에서 볼 날도 오지 않을까.
※ 제작지원 B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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