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8일 후’ 스틸컷. 사진 = NAVER 영화

영화 ‘28일 후’(대니 보일, 2002)는 인물보다 상황에 집중한다. 썰렁한 거리를 걸어가는 주인공 짐을 저 멀리 또는 저 위에서 보여주는 이유다. 카메라가 피사체를 멀리서 촬영하면 화면은 자연스럽게 피사체 주변 영역을 강조할 수 있다. 높이 솟아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들로 보아 꽤 번화가임을 짐작할 수 있지만 주인공 외에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 거리. 도시는 수상한 공기로 꽉 차 텅 비어있다. 자신을 중국 우한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인이라 소개하며 한 유학생이 얼마 전 뉴스에서 이렇게 인터뷰했다. “평소에는 사람이 붐빌 광장에 지금은 운이 좋아야 겨우 몇 명을 볼까말까 하다.” 짐과 유학생이, 영국 거리와 우한의 광장이 각각 겹쳐보이며 마음이 무겁다. 실제 상황과 영화를 무리해 비교하려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가혹하게 묘사한들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지만, 삶은 실제로 혹독하고 아찔하다. 지면을 빌려 유학생의 무사 귀국과 우한 현지인들의 건강을 기원한다.

‘28일 후’의 바이러스는 치명적이다. 걸리면 눈이 튀어나오고 동시에 충혈한다. 수 초 내에 토혈하고 20초 내에 갈 지 자로 뛰어다닌다. 이때부터 감염자는 다른 생명을 위협하는 날선 공격성을 띤다. 1차 감염자가 혈액을 통해 옮긴 바이러스 때문이다. 평범한 소년이었을 한 감염자는 주인공을 공격하며 이렇게 고함친다. “I hate you!(난 네가 싫어!)” 느닷없는 악다구니를 쓰지 않았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를 시간차 공격은 소년 감염자 스스로를 해쳤다. 프랭크도 비슷한 경우다. 그의 분노 역시 알아듣지도 못할 까마귀를 잠시 거친 뒤 곧장 그에게 돌아왔다. 화를 돋운 까마귀는 그만 날아갈 뿐이었다. 영화 전체에서 프랭크가 화를 낸 건 이때가 처음이었지만 곧 마지막이었다. 감독이 미울 정도로 대가는 가차없었다. ‘눈에 핏발이 선’ 그는 “화 내서 미안하구나”라는 슬픈 유언을 딸에게 남기고 만다. 이 바이러스 이름이 ‘분노’다. 주인공은 병원에서 깨어났으면서 분노 바이러스 항체가 없다. 전화선이 다 끊겨 공중전화는 괜히 손만 잡아봤다. 분노 바이러스에 걸리면 가까운 의료 기관이든 ‘국번없이 1393’이든 모두 소용없다는 뜻이다.

영화 ‘28일 후’ 스틸컷.

‘28일 후’에는 딱 한 부분 픽션이 아닌 장면이 있다. 감독은 영화 시작과 동시에 얼핏 실제 보도 영상처럼 보이는 영상들을 나열해 보여준다. 뉴스 등 기존에 실제 녹화한 영상을 재편집해 연출자 의도를 달리 강조하는 영화 문법을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라 부른다. 간혹 실제를 가장해 파운드 푸티지인 척하는 경우도 있지만 ‘28일 후’는 아니다. ‘경찰’이라는 한글 두 자가 결정적 힌트다. 이걸 발견할 정도라면 “나 오늘 바뀐 거 없냐”고 묻는 연인에게 혼날 일 없는 눈썰미다. 둘이서 하나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장면 속 진압복 등 부분 흰 글씨가 ‘경찰’이다. 그러니 한글 쓰임새가 영 반갑지 않고, 꼭 연출하자면 우리 경찰청 쪽 입장도 확인했어야 할 것 같은 장면이다. 다른 국가에서 녹화된 영상에는 군밧줄에 목이 매달린 남성에게 군중들이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도무지 폭력에 분별력이 없어 관객이 쉽게 보기 힘들 정도로 자극적이다. 이를 감수하고도 파운드 푸티지를 쓴 의도는 분명하다. 영화는 물론 픽션이지만, 혐오와 폭력은 모두 실제 상황이라는 뜻이다.

주인공 일행이 목숨을 걸고 도착한 42번 봉쇄로는 덫이었다. 자신의 목에 스스로 총구를 겨눴다는 군인들에게 소령은 일행 도착 8일 전 ‘여자’를 약속했다. 짐과 셀리나 사이에서도 사랑이 막 싹트려던 참이었다. 생존 본능이기는 주인공 일행과 군인 무리가 같지만 한쪽에 있는 공감력이 다른쪽에는 없다. 무리 중에서도 성적 욕구 해소를 위해 타인의 고통을 즐기겠다는 군인들은 뭐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눈에 띄는 건 소령의 태도다. 감염된 부하 병사를 사슬에 묶어 굶기며 바이러스를 분석하겠다는 구실이 좋다. 공포를 조장해 타인을 유인하고 이용한 뒤 고통을 가책없이 이용하면서 제 살 길을 찾는 위장한 현실주의자, 어딘가했더니 <베놈>(루벤 플레셔, 2018)에서 봤던 그 빌런이랑 비슷한 놈이다. 분노 바이러스가 여기서부터 자꾸 퍼진다. 희망은 같이 못 살 바에 차라리 같이 죽자며, ‘인간은 꽤 따뜻한 종족이었으며 지구는 꽤 살 만한 곳이었다고 외계인들이 기록해줄 것’이라 믿는 쪽이다. 그러니 바이러스에 감염된 신부를 고작 한 대 때리고는 “때리면 안 되는데, 이러다 나 천벌 받는다”며 회개하다가, 되레 무장한 군인에게는 악바리로 달려드는 주인공을 감독이 마치 감염자처럼 묘사하는 것은 보기에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인류를 해치는 쪽이 어딘지는 명확하다.

영화 ‘28일 후’ 스틸컷. 사진 = NAVER 영화

“감염자에게 무조건 발포 명령”이라니 아무리 영화라지만 세상 정부는 어디를 막론하고 왜 다 이 모양인가 싶어 혀를 차지만 편안하게 공권력과 선을 긋고 욕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오늘자 포털 기사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댓글은 ‘비감염자도 의심스러우면 발포하자’는 수준이다. 국가 행정이 포용력을 잃고 기사가 민족 감정을 부추기면, 거기에는 산사람더러 죽으라는 댓글이 드물지 않게 달린다. 분노 감정을 조장하면서 분위기에 편승해 유튜브 영상이나 마스크로 돈을 벌려는 사람들도 있다. 생존자는 여기로 오라며 베란다에 크리스마스 장식은 못 달망정. 실로 혐오와 폭력이 픽션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놀랍게도 충북 진천·충남 아산에서 분노 바이러스 백신을 찾은 모양이다. “우한 교민들이 14일 동안 건강히 지내다 가길 바란다.” “우한 교민들 환영합니다.” “그동안 마음 고생 많으셨죠?” 주민들이 교민 귀국 행렬을 안심시키기 위해 쓴 손팻말과 SNS 응원 게시물 내용들이다. 신종 코로나 확산 28일 후에 얻은 귀중한 분노 바이러스 백신이다. 전염병은 강력하다 한들 유행이겠지만, 우리에게는 혐오라는 고질병이 더 큰 문제다. 신동욱 기자 woogy0213@kookje.co.kr